[수기] 나는 브로커였다.-11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11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중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을 탈출하여 나올 때 자녀들과 동반하여 나오신 분들에 대하여서는 1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피난처로 안내하였으며 부모와 어린이들을 통하여 북한내부의 학교와 교육 실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향미의 오빠 명일이는 두만강을 넘어온 지 몇 달 아니 되였으므로 명일에게도 북한 내부의 학교실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을 잊지 않았었다. 학교에는 컴퓨터가 한두 대 있다고 하였으며 학생들은 나무로 만든 키보드를 이용하여 타자 연습을 한단다. 학습장이나 연필을 비롯한 모든 학용품이 귀하여 다 시장에서 구해다 사용하여야 하며 신문지를 이용하여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북한을 나올 때의 사정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학교에 가면 한 학급에 5-6명 나올 때도 있으며 그럴 때면 공부를 못하고 선생님네 집에 가서 석탄을 나른다든가, 혹은 부업밭에 가서 일을 한단다.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학생들은 먹을 것이 없어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학생들이 밧줄을 가지고 산에 가서 나무뿌리를 캐여서는 밧줄로 묶고는 그것을 힘들게 끌고 내려와 학교로 가져간단다. 명일은 16살이라고는 하지만 키도 작고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데 이 아이가 조선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나무를 밧줄로 끌어서는 학교에 가져갔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의 의심을 알고나 있은 듯 명일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자기도 나무를 끌고 다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산에는 구호소(방랑자 어린이를 수용하는 곳)가 두 곳에 있으며 수용소에 있는 어린이들을 만나려고 하면 책임자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부모가 아니면 만날 수도 없고 친척인 경우에는 친척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 있어야 한단다. 어린이들을 외부와의 접촉을 못하게 하는 원인은 탈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갔거나 중국에 있는 경우 아이들을 몰래 빼돌려서는 두만강을 넘어서 도망을 가기에 구호소의 어린이들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엄청 경계하고 있단다.

말이 구호소이지 하루에 옥수수 한줌 정도 되는 삭사 두 끼를 주고는 좀 큰 아이들을 시켜서 거리에 나가서 돈을 얼마씩 가져오라고 한단다, 그러면 구호소에 있는 어린이들은 좋아라 하고 바깥에 나가서 실컷 동냥(빌어먹음)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는 구호소에 올 때면 빈손으로 들어온단다. 그 가운데서도 어떤 어린이들은 바깥에 동냥을 나갔다 다시 돌아오지 않고 어데론가 떠나가군 하여 구호소에서 어린이들의 바깥출입도 엄격히 통제를 하고 있단다.

나는 최근에 탈북하여 오신 분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회령에 9월11일 상무라는 것이 새로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9월11일 상무는 2005년 9월11일 김정일이 거리에 방랑하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자 방랑자 아이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할 데 대한 지시가 내려와서 방침을 받은 날짜를 상무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9월11일 상무는 시당(군당) 책임비서의 직속 관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회령에서는 제지공장 뒤쪽에 있는 낡은 건물을 개조하여 방랑자 아이들을 데려다 돌보고 있는데 시설이나 어린이들에 대한 관리가 말이 아니라고 한다. 북한에서 운영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시설이니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가장 초보적인 것마저도 갖추어져 있는 것 같지를 않다. 나는 여러 기회에 걸쳐 회령에서 나오시는 분들을 통하여 그곳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였으며 탈북자들은 구호소의 위치와 운영에 대하여 하나와 같이 증언을 하였다,

김정일의 방침이라고 하여 급조하여 만들어진 상태에서 체계적인 관리도 아니되고 식량공급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돌볼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없어서 어린이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지만 보육원들이 식량을 빼돌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고아들이 상태는 눈뜨고 볼 수가 없다고 한다.

회령은 도문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연길에서 도문과, 회령으로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고 회령에서 나오시는 탈북자 분들이 많아 회령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나는 회령에서 나오시는 분들을 통하여 9,11상무에 대하여 끊임없는 실태파악과 어떻게 하면 9.11상무에서 운영하는 구호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능성 여부를 료해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고 1년 정도 회령에 대한 료해를 마친 후 회령에 있다는 9월11일 상무에서 운영하고 있는 구호소에 대한 지원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구호소에 대한 지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었던 것은 누구를 내세워서 북한에 들여보내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북한에 들어가서 구호소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주자면 책임적이면서도 임기웅변 할 수 있는 일군을 선택하여야 하였다. 나에게는 몇 년을 함께 일하면서 검증된 훌륭한 사역자가 있었다. 그분은 우리 사랑의 집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교육과 생활을 돌보아 주었으며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탈북자들을 중국의 여러 곳에 있는 또 다른 피난처들에 데려다 준 대담함과 책임감 ,그리고 임기웅변 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분이였다. 내가 중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훌륭하신 분들을 만났고 그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사역하시는 분은 이미 여러 차례 북한을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특히 어린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시였다. 옥별이. 철호, 송림이와 대성이 형제 등 많은 탈북 어린이들이 그분의 보호 속에서 생활하면서 공부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일군이 준비되면 그 다음에는 재정문제인데 일을 하여 가면은 재정문제도 풀리여 질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번 북한에 들어가서 어린이들에게 한두 끼의 빵을 공급하여 주는 것으로 계산하여도 7-80만원이면 될 것 같았고 빵은 돈을 주고 사지 않고 주변에서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았다. 북한에 대한 지원은 믿을 수가 없고 열을 주면 두 세 개만 어린이들에게 공급될 수 있다고 판단을 하였음으로 쌀이나 밀가루가 아닌 빵을 공급함으로 장기보관을 하지 않고 곧 소비로 이어지면 손실을 최소화 할 수가 있다고 나는 판단을 하였다. 일차적으로 한 달에 한두 번은 빵을 공급하여주고 일년에 한두 번은 중국에서 값싼 옷을 구입하여 어린이들에게 공급을 하여 주리라고 생각을 하였다.

중국에서 북한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만 구호소에 접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함께 일하시는 분에게 나의 의견을 말씀드리니 자신이 하여 보겠다고 적극적인 찬성을 하여 주시였고 북한에 들어가면 인민 위원회나 당 기관 사람들을 만나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구호소 접근이 가능한 통로를 찾아내며 구호소에 대하여 중국 사람이 민간인 신분으로 개인적으로 지원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처음으로 북한 구호소의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대로부터 3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회령만큼은 9.11구호소에 대한 지원을 실행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행정적인 것과 그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알아보는 데만도 많은 시간을 흘러 보냈다. 2006년 가을이면 일차적으로 북한에 사람을 들여보내서 구호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파악을 한 다음에는 빵을 공급 받아가지고 북한에 들여보내면 된다. 모든 것이 준비가 완료된 시점에서 나에게는 뜻밖에 상황이 발생하였다.

위해에 있는 피난처에 보냈던 수남이와 순옥이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진술서를 8장이나 상세하게 썼는데 진술서에는 함께 일하시던 분과 나에 대하여서도 아주 구체적으로 진술하여 산동성 공안국과 길림성 공안국에서 합동으로 수사가 진행되여 사역하시던 선생님의 부부가 공안에 체포되였다. 나는 사역하시던 분의 체포소식과 함께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여 며칠 만에 부부는 석방될 수가 있었지만 더는 저와 함께 일할수가 없었다. 믿고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든 때에 사역하시던 분을 잃게 되여 오래 동안 준비하여온 9.11구호소에 대한 지원을 실천에 옮길 수가 없었다.

내가 북한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풀죽도 변변히 얻어먹지 못한 아이들이 길거리에 나와 석탄 덩이를 줍고 낡은 비닐을 주어서는 집에 가져가서는 땔감으로 보태군 하였으며 생활이 정말 째지도록 가난한 집 아이들은 산에 가서 풀도 뜯고 시장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거나 여인들이 먹는 음식을 입안에 들어가는 것도 날쌔게 빼앗아서는 죽기 내기로 도망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학교에는 학생이 몇 명 없었고 창문의 유리는 도적질 하여 가거나 깨여져서 성한 유리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학생들은 교과서가 없어서 윗반의 학생들의 교과서를 회수하여 이용하지만 그것도 몇 명에 한권도 돌아가지 않는다. 책이라고는 "로동신문"종이를 책으로 묶어서 사용하면 좋은 책이고 신문지에다 글을 쓰고는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였다. 내가 탈북한지도 7-8년이 다 되였지만 북한의 어린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상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탈북하여 나온 어린이들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키가 작고 여위여서 얼굴은 까맣고 눈만 반짝인다. 내가 만난 송림이나 명일이도 공부를 못하여 우리글과 초보적인 산수 문제도 풀지 못하였다. 어린이들을 나라의 왕이라고 입버릇처럼 외워대는 김정일 독재 밑에서 수많은 꽃제비들이 시장의 골목을 누비면서 방황하고 철도역 석탄 재무지가 그들의 잠자리가 되여 어때인 가는 기차에서 버리는 뜨거운 석탄재에 받혀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보아온 꽃제비들과 여기저기에 널려 있던 아이들의 죽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한조각의 빵이라도 쥐여 주고 싶었고 밝고 명랑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다.

중국에서 오래 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탈북자들을 만나 보았으며 그중에서 몇 가지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가 만나 본 성씨라는 탈북 청년이 중국에서 숨어살다가 중국공안에 잡혀서 강제 북송되였을 때 겪은 이야기를 하던 것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지금의 나의 기억으로는 무산군 안전부 감옥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성씨가 갇혀있던 감방은 50여명의 탈북자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수감자들은 세수도 할 수 없고 온몸에 때가 얼마나 끼여 있는지 몸에서 나는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수감자들의 옷은 이 (이시포)로 새하얗게 될 정도로 이가 득실 거리였다고 한다. 안전부에서 조사를 할때는 조금만 거짓으로 말하거나 대답을 하지 않으면 군화발로 마구 차고 짓밟고 때렸으며 70세가 넘은 할아버지에게도 손자벌이 되는 조사관이 장군님의 은덕을 배반하고 중국에 도망갔다고 주먹으로 로인의 얼굴을 마구 때리더란다. 경위가 어떠하던지 여위고 여위여서 오늘 내일이면 죽을 것 같은 년세가 많으신 분을 그렇게 때리는 것을 보면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라고 탈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란다.

감방 안에서 누군가 조금이라도 말하거나 부스럭거리면 감방 철창문 짬으로 손을 내여 보내라고 하고는 두 손을 쫙 펴게 한 다음 무기 소제대로 사정없이 손등을 내려친단다. 그러면 두 손등이 갈라지는 것 같이 아프고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치게 된단다. 감방에서 매도 많이 맞고 여러 가지 고문이 있지만 자신은 무기 소제대로 손등을 때릴때면 그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단다. 한 덩어리 밥을 얻어먹기 위하여 중국에 갔다 온 것이 조국 배반이며 역적들이라고 두 손은 머리 위에 얹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일명 뽐푸질을 하루에 500개를 시킬 때도 있단다.

어느해 1월경에 자신들이 있는 감방에서 누구인가 말하는 것을 듣고 달려온 안전원은 누가 말하였는가? 고 묻자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수감자들을 시켜서 물을 몇 바께쯔(양동이)나 가져다 감방 안 바닥에 붓고는 수감자들을 누웠다 일어났다를 수십 번 시키였단다. 감방 안 바닥은 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수감자들의 옷은 순식간에 물자루가 되고 말았다.

일년 열두 달 중 가장 추운 때에 잘 먹지도 못하고 변변히 입을 것도 없는 수감자들의 얼음같이 찬 방에 물을 가져다 붓고는 모든 수감자들의 옷이 물에 젖도록 가혹한 야만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감방안의 모든 탈북자들이 독감에 걸리고 다리가 얼어들었으며 골반이 병들고 젖은 옷은 일주일이 되여서야 사람의 체온에 의하여 마를 수가 있었단다.

나는 2002년 겨울, 한국에 정착한 한 탈북여성으로부터 탈북여성들이 북한에 잡혀 나가면 강제 낙태 당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탈북여성이 낳은 갓난아이의 얼굴을 종이에 물을 적셔 덮어놓음으로써 갓난아이가 숨지는 것을 직접 목격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하여도 나는 내가 살던 북한에서 그렇게 험악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언론에도 공개되고 하였지만 나로서는 그에 대한 그 어떤 증거를 찾는다고 할까? 나름대로 북한 탈북여성들이 강제 북송되면 강제 낙태를 당하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었다.

2004년 11월경에 연길에 있는 피난처에는 영옥이와 향미네 오누이. 그리고 왕청현 대홍구 모 마을에서 살던 혜선이라는 분을 모셔 왔었다. 혜선이라는 분도 북한에 강제 북송되였다가 몇 달 전에 간신히 재 탈북에 성공하여 중국에 들어올 수가 있었고 그가 한국행을 바라고 있고 누구인가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하여 내가 찾아가서 그분을 피난처에 모셔왔던 것이다.

나도 여기저기로 끊임없이 나돌아 다니기에 어쩌다 한번씩 피난처에 들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상태도 살펴볼겸 북한에서 고생하던 이야기도 들을겸 하여 피난처에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북한에서 정말 강제 낙태를 하고 있는가고 물어보았다. 혜선이라는 분은 년세도 많았으며 북한에 잡혀가서 고생 꽤나 하였는지 얼굴을 찡그리면서 생각하기도 싫은 표정으로 낙태를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분에게 탈북 여성들을 잡아다가 낙태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솔직히 이야기 하였더니 그분은 자신이 겪었던 수감생활 과정에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었다.

혜선 아줌마는 2003년 여름경에 왕청의 모 지방에 살면서 농사일을 하였으며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들이 닥친 중국 공안에 의하여 체포되어 북한에 강제 북송 되였다고 한다. 혜선 아줌마가 북한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감방은 자그마한 방이였으며 그 감방 안에는 40여명의 탈북자 출신 수감자들로 제대로 앉을 자리도 없이 사람들이 꽉 들어찬다고 한다. 하루는 안전원이 감방문 앞에 와서 수감자들에게 누가 해산 방조를 하여 보았는가?고 말하자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사람들을 일일이 살펴보던 안전원은 혜선 아주마를 가리키며 나와서 해산 방조를 하라고 말하였단다. 혜선 아줌마는 북한에 있을 때 해산 방조를 하여 본 경험도 있고 하여 군말 없이 밖으로 나오니 안전원은 혜선 아줌마에게 이제 누가 해산을 하여야 하는데 그 여자가 중국에서 살면서 임신을 하였으니 아이를 낳으면 뒤집어 놓으라고 말하였단다. 해산 방조를 하여본 경험이 있는 만큼 혜선 아줌마는 아이를 뒤집어 놓으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대답을 피하고 주춤거리자 안전원은 꼭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눈을 부릅뜨더란다.

여자가 해산을 하는 장소는 따로 없었고 수십 명의 탈북자들로 꽉 들어찬 감방안의 앞쪽 출입문 쪽에다 거적 데기를 펴놓고 그 위에 탈북여성이 누워 있었고 임신부는 산통이 오는지 심한 고통 속에 몸부림 치고 있더란다. 임신부 앞에 있으면서 혜선 아줌마는 이제 막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하여야 할지 가슴만 쿵쿵 울리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이를 뒤집어 놓으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전원들이 자기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어 무섭기만 하더란다. 거적데기 위에 누워서 몸부림치던 탈북녀는 고통 속에 해산을 하였지만 이미 죽은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아마 탈북녀의 태아는 중국공안에 체포되면서, 북한에 넘어온 다음 수감생활 속에서 받은 커다란 정신 심리적 충격과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저질스럽고 원한 많은 악정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기 보다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하고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죽어서 태어낫는 지도 모른다.  혜선 아줌마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정말 너무 끔찍스러워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혜선 아줌마는 그 후 무사히 한국에 입국하여 지금은 광주에 사신다고 한다.

나는 많은 탈북자들로 부터 탈북여성들이 북한에 강제 송환되면 임신 여부 검사를 받고 있으며 여성들이 중국에서 임신한 아이를 낳으면 뒤집어 놓거나 혹은 종이에 물을 적셔 아기의 얼굴을 덮어놓고 인위적으로 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가 있었다. 한 탈북자는 갓난아기를 3일간을 뒤집어 놓아도 죽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에는 아이의 다리를 잡고 거꾸로 세워서 조금만 흔들어 주면 곧 죽는다고 한다. 북한에서 강제 낙태와 갓난아이들에 대한 살해는 범죄 의식이 없이 거의 합법적으로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귀중함을 모르고 북한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강제 낙태와 영아들에 대한 살해 행위가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북한 땅에서의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의 운명은 더 말할 수 없이 살인적이고 비참한 운명에 처하여 고통 받으며 죽어갈 것은 불 보듯 한 일인 것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감행되고 있는 탈북 여성들에 대한 임신 여부 검사와 영아 살해 행위는 인류 역사상 그 류례를 찾아 볼 수 없고 짐승도 낯을 붉힐 천추에 용서 못할 살인 행위이다. 인민의 피와 땀을 빨아 먹고 살쪄온 인류 력사의 쓰레기이며 독재자인 김정일 일당을 하루 빨리 때려잡고 북한에서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존중받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찾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

2006년경부터는 새로운 브로커들이 등장하여 기승을 부리면서 이리 저리 쫓기여 다니며 힘들게 살아가는 탈북자들의 돈주머니를 깡그리 털어내려고 별의별 짓들을 다하고 있었다. 연길에서 만난 철규라는 사람이 대표적이라 할수 있다. 그는 왕청현 백초구진에서 살다가 돈화로 집을 옮긴 후에도 탈북자들이 밀집하여 있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며 수천 원부터 만원씩 받아먹은 자이다. 철규는 탈북자들에게 한국 가는 길을 알려준다고 하면서 중국 남방의 도시 이름을 알려주고는 그곳에 가면 당신들을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탈북자들을 떠나보내군 하였다. 파렴치하기로 이름난 철규는 북한을 탈출 하여 나왔지만 또다시 인간 사냥꾼 인신 매매범들에 의하여 중국에서도 제일 가난한 집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홀아비나 불구자들에게 팔려가서 온갖 천대와 멸시 고통을 받으면서 한푼 두푼 모아둔 탈북여성들의 돈을 보호하여준다는 명목으로,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서 교묘하게 그들의 돈을 갈취 하였으며 돈을 받았으면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갈수 있는 정확한 선을 연결하여 그들이 한국으로 갈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생소한 곳으로 탈북자들을 보냄으로서 탈북자들을 더욱 위험한 상황에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철규를 처음 만난 것은 2006년1월 어느 한 선교사가 자신의 피난처에 있는 탈북자들을 살펴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내가 처음으로 철규가 있는 피난처에 갔었다. 피난처에는 젊은 여성 두 명과 한 할머니가 있었고 며칠 전에 함께 있던 인철이는 어데론가 도망갔다고 한다.

내가 피난처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녘이여서 탈북자들은 금방 잠에서 깨여난 것 같았고 그들의 얼굴은 하나와 같이 어두워 보였다, 방안을 두루 살펴보아도 작은 방안에는 이부자리가 두툼하게 갈려 있었고 다른 방에는 이부자리도 없었다. 아침 식사는 밥과 간장 된장 전부였고 나에게는 한 토막의 칼치 볶음이 나왔다. 물고기 음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에게만 반찬이라고 주니 나의 마음도 편안치는 못하였다. 아침 식사를 대충 마친 나는 탈북자들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고 물어보아도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형편이 어렵다고 하지만 된장국이나 김치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이 피난처를 운영하시는 분을 잘 알고 있었다.

피난처를 운영하시는 선교사님은 정직하시고 신실하시였고 탈북자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대단하신 분이고 내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만나 보았을 때는 한달분의 생활비를 남겨두고 오셨다고 하시였는데 내가 보았을 때는 탈북여성들이 이부자리도 없고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생활하여 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떠나기에 앞서 철규에게 이부자리 몇 개와 라지오 두개를 사다가 각방에 놓아줄 것과 일주일분 생활비를 주면서 담당하신 선교사님이 곧 오실 터이니 그때까지 피난처를 잘 관리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었다. 피난처에서 도망간 청년은 지금쯤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왜 선교사님의 말씀대로 피난처에 있지 않고 뛰쳐나왔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누구하나 말을 하지 않고 어두운 인상을 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얼굴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나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피난처를 뛰쳐나간 인철을 만날 수가 있었고 인철은 철규가 탈북자 여자들의 돈을 사기치고 있으며 선교사님이 남겨준 생활비로는 날마다 고급식당에 드나들고 이부자리는 모두 자기의 누나의 집으로 가져간다고 말하면서 철규는 한국의 선교사만 찾아서 다닌다고 한다. 한국의 선교사를 만나면 자기가 탈북자 돕는다고 하면서 후원금을 얻어 가지려고 하며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서 몇 천 원씩 사기를 치고 있단다.

나는 인철을 만나본 이후로 피난처에 있던 탈북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였고 여러 곳에서 탈북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철규가 수많은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한국에 보내준다고 하며 돈을 사기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은 천국으로 가기를 꿈꾸는 것만큼이나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한 탈북자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탈북자들에게 한국 가는 선을 연결하여 주는 대가로 오천 원씩 받아먹고 브로커들과 연결 하여주는 신종 브로커들로 하여 탈북자들은 더욱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브로커는 경비를 대여서는 위험한 중국 경내를 수천 키로메터를 이동하여 탈북자들을 3국으로 탈출시키지만 신종 브로커는 손톱하나 까딱하지 않고 탈북자들이 죽던살던 돈만 가져오면 한국 가는 길을 연결시켜준다고 하면서 돈을 뜯어내는 일종의 사기범들 이다. 훈춘에 살고 있는 오영수라는 자도 탈북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데는 이골이 난 자이다. 키가 작고 얼굴이 까마짭짭하게 생긴 사람이 자기가 탈북자들을 보호하여 주고 있다고 하면서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중국 사람들 속에서도 좋은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는데 시간이 흐르고 그가 소개한 탈북자들이 한국에 나온 다음에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 소개비로 5000원씩 주었다고 한다. 영수는 탈북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처지는 아랑곳없이 무조건 돈을 가져와야 브로커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나에게 탈북자들을 소개할 때는 자기는 돈을 하나도 받지 않고 불쌍히 생각되여 탈북자들을 도와주게 되였다고 하였고 탈북자들에게는 영수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나에게 온 탈북자들도 영수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시일이 흘러서 이야기를 하였고 훈춘쪽에서 오는 탈북자들을 만나보면 영수가 한국에 가려고 하는 탈북자들로부터 오천 원씩 내놓아야 한국에 갈수 있게 도와줄 수가 있다고 하였단다. 2006년도 다 저물어 가고 있을 때 영수는 훈춘에 탈북자 오누이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을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였다. 탈북자 오누이라면 어데 가서 자리를 잡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그들을 만나 보려고 훈춘에 가겠다고 하니 오늘은 그들이 어데를 갔고, 다음에는 또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면서 계속 오누이를 한국으로 갈수 있게 하여 달란다. 오누이를 만나보고 그들을 피난처에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나는 종내로 오누이를 만날 수가 없엇고 2007년4월에 우연히도 오영수가 말하던 오누이를 만날 수가 있었다. 오누이중 성복이가 누나였고 누나는 성격이 시원하여 말도 잘하고 일도 잘 하였다. 나는 오누이들을 통하여 자기네는 오래전부터 한국 가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한국가는 줄을 잡지 못하여 지금까지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2년 전에 훈춘에서 오영수를 알게 되였고 오영수는 오누이에게 자기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고 있는데 오누이네도 한 사람당 중국돈으로 오천 원씩 가져오면 한국에 보내준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오영수는 어린 오누이에게서 돈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는 사람들을 연결 시켜주지 않고 있었으며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가면 돈 덩어리를 잃는다고 생각하여 오누이를 계속 유혹하면서 훈춘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오영수는 나에게 탈북자들이 불쌍히 생각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돕고 있다고 하였으며 두 명의 여성(한번에 한명씩) 을 나에게 데려올 때도 친부모나 형제도 따라 하지 못할 만큼의 친절을 나타나면서 뒤로는 탈북자들이 피눈물로 한푼 두푼 모아둔 귀중한 돈을 갈취 하였던 것이다. 오영수 같은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 어린 탈북 청소년의 돈을 빨아 먹으려고 갖은 수작질을 다 하였으며 한국에 보내주겠다고 유혹하는데 넘어간 탈북자들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여도 언제인가는 한국으로 갈수 있는 길이 연결될 것이라 믿고 신종 브로커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시간도 잃고 돈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종의 브로커는 훈춘에만도 몇 명이 더 있었으며 다른 지방에서도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서 일인당 중국돈 오천 원씩 받고 어데론가 데려 가서는 돈이 없으니 너희들 남편에게 돈을 만원씩 더 보내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을 팔아먹겠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하면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내가 사기적인 브로커들을 미워하는 것은 탈북자들의 어려운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인간의 량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이중 삼중으로 탈북자들의 피를 짜내여 먹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의 생사운명과는 관계없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악용하여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야만적인 행위이며 사기적인 수법으로 탈북자들의 돈주머니를 흩어내려고 하는 자들이 있음으로 하여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려고 하여도 사기범들에 의하여 왜곡된 정보를 받고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였다. 특히 산간지역 농촌에 살아가고 있는 탈북 여성들의 경우에는 외부의 정보를 접하여 보기가 어려운 형편에서 사기범들의 속임수에 쉽게 걸려들고 있으며 돈만 잃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도 마음도 함께 잃어가고 있다.

금년 3월경, 탈북여성 한분이 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받게 되였다.
나는 전화로 탈북녀에게 어떻게 되여 사기에 걸려들었는가? 고 물어보았다. 탈북녀는 자신이 북한 함북도 새별에서 온 여자이며 2년 전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중국으로 오게 되였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료녕성의 산골 마을에도 경찰의 검사가 심하여 한국에 가려고 하였단다. 한국으로 가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제대로 된 선을 찾을 수가 없었고 동네 누구의 소개로 알게 된 브로커에게 중국돈 오천 원을 선불로 주면 한국으로 데려간다고 하여 자신이 몰래 모아 두었던 오천 원을 브로커에게 주고 6명의 탈북여성들과 함께 떠난 것이 브로커에게 걸려 다시 팔려가게 되였었다고 한다. 브로커는 어느 여관에서 탈북녀들을 가두어 놓고 한사람씩 자기의 남편들에게 전화로 중국돈 만원을 보내라고 말하게 하였으며 남편들이 돈을 보내지 않으면 탈북녀들을 다 팔아버리겠다고 하였단다.

나에게 도움을 청한 탈북녀는 여관에 갇혀 있으면서 도망갈 기회를 엿보다가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탈북자들을 이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교회의 무엇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탈북자들에게 한국 가는 길을 알선하여 준다는 명목으로 소개비를 엄청나게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직분을 지켜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일부는 전도사요, 집사요 하면서 직분을 이용하여 탈북자들에게 한국의 선교사들을 만나게 하여주고 그들을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서 돈을 내여 놓지 않으면 절대로 브로커나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탈북자들은 한국의 인권단체나 선교사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한 이용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일종의 직업으로 이용 하고 있었다. 나는 중국에 있으면서 이러한 현상들을 가끔은 체험 할 수가 있었고 그때마다 한국의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들에서 보다 질 높은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좋은 일군들을 양성하여주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지금도 중국의 곳곳에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숨어 살고 있으며 그들은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애타게 노력을 하고 있다. 탈북자들은 중국 공안에 쫓기여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고 한국에 가고 싶어도 사기범들에게 또다시 당하는 악순환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버림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희생양이였다.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수감생활을 하여가는 동안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것은 없었다. 잠자기 전이나 쭤발(범죄의 잘못을 회계하는 시간) 시간이나 온 하루를 보이지도 않고 응답도 없는 나의 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의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고 탈북자 문제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여 보았다.

자그마한 농촌 마을에서 나서 자라 10년7개월이 넘는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나의 고향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로 꾸려 나가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일 하였다.  그 지상 낙원 같은 꿈속에서 깨여나기 시작한 것은 나의 막내아들을 잃고 난 이후였다. 나의 청춘을 바쳐 지켜낸 나의 조국은 인민의 무덤으로 변하여 갔고 인민들은 신기루와 같은 김정일의 방침이나 조선로동당에 대하여 더는 신뢰를 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이 살아갈 길을 찾아 여기저기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나라의 법질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워졌고 개인과 가정, 동료들 호상간에도 인간의 윤리 도덕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온 나라는 향방을 다니는 사람들로 차고 넘치였다. 수백만 인민들이 굶어죽고 거리의 곳곳에 방랑하는 아이들로 차고 넘치는데 김정일은 눈만 뜨면 조국통일 타령을 습관처럼 하고 있다. 로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정(일제시기)때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인민들의 무덤위에서 통일 대통령을 하여 보겠다는 김정일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이다. 나는 생각 끝에 이 나라에서 살아보았자 죽음밖에는 올 것이 없다고 판단을 하고 중국으로 가리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며칠동안 고생 끝에 중국에 들어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되여 중국에 온지 일년 만에 철민이를 고마우신 분을 만나 그분에게 맡기고 나는 연길, 룡정, 왕청을 떠돌면서 방랑자로 살아가게 되였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