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 – 10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10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1998년12월, 내가 있던 화룡시 룡성향 흥서촌에는 6명이 탈북자들이 있었으며 어느 날 새벽 중국 경찰이 주민 부락을 수색하여 탈북자 3명을 체포하여 강제 북송하였다.

그로부터 8개월 후, 체포되여 강제 북송되였던 사람이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룡서촌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한번 북한으로 잡혀 갔다가는 살아서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데 한동네에서 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니 반갑기도 하고 그동안 북한의 소식이 몹시 그리워 그에게 가서 인사를 나눈 후 어떻게 되여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였는가? 고 물어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중국 경찰에 체포되여 며칠 만에 남평 세관을 통하여 조선으로 가게 되였는데 세관을 연결하는 다리 중간쯤에는 군인들이 없고 앞쪽으로는 조선 경비대 군인들이 자기들에게로 오고 있었단다. 그 순간에도 자기의 머리 속에는 조선군대들에게 넘겨지면 끝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 다리위에서 뛰어내렸지만 잘못 떨어져서 무릎이 얼음판에 박혀 무릎 슬 관절이 깨여지였단다. 자기는 다리가 아픈 것을 참고 두만강 얼음판위로 힘껏 달리였지만 중국군인들이 달려들어 총탁으로 자기를 마구 때려서 잡히게 되었단다. 그에게는 오누이 쌍둥이 자녀가 있으며 두 아이와 함께 중국에서 살아가기는 너무나 힘들어서 두 아이 중에 여자애를 화룡에 있는 중국 사람에게 주었다고 한다. 처와 자식은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고 혼자 재 탈북에 성공한 그는 중국 사람에게 준 딸아이가 보고 싶어 찾아 갔지만 그의 딸과 집주인은 이미 어데론가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 이후로부터 가족이 그리워지면 눈물을 흘리고 술로 마음을 달래고 타락하여 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로는 내가 있던 고장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생사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넘어 왔지만 중국 땅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중국공안의 탈북자 사냥은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탈북자들을 죽음에로 몰아넣고 있으며 연약한 여성이 삶과 죽음의 경계였던 위험한 창가에도 서슴없이 뛰어 오르게 하였던 것이다.

몇 년을 중국에서 일하면서 두만강을 넘어오는 탈북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삶과 죽음의 계선을 넘나드는가를 잘 알 수 있게 되였다. 왕청현 백초구진에서 만나본 한 청년은 잘생긴 용모에 스포츠형의 머리를 깎은 것이 첫눈에도 건장하고 성품이 단정하여 보였다. 나는 그와 북한에서 살아가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신의 머리에 크게 찢어진 흔적이 있는데 그 상처는 어떻게 되여 생기게 되였는가고 물어보았다. 청년은 자신의 머리 앞쪽에 있는 상처는 온성에서 살아갈 때 개인이 파놓은 석탄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여 시장에 내여다 팔아서는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 하였는데 어느 날인가 허리도 펼 수 없는 낮고 좁은 석탄굴에 들어가서 곡괭이로 석탄층을 찍어 내려다가 곡괭이 날이 암석에 맞고 튕겨져 나오면서 머리를 다치게 되였다고 한다.그는 그때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좁은 굴 안에서 피가 흐르는 머리를 한참 동안이나 감싸고 있다가 겨우 석탄굴을 빠져 나왔다고 한다. 머리 위 중간부분에 난 상처는 자기가 두만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북한군 경비대 군인들에게 잡혔을 때 앞에서 달려오던 경비대 군인이 총탁(개머리판)으로 내려 치여 상처가 나게 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석탄을 캐여서 하루살이로 살아가고 있었고 어떻게 하나 살림을 일쿼 보자고 하여도 조선에서는 아니 되겠고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야 살아갈 수가 있으니 두만강을 건너가 몇 달만 일하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에 갈 생각을 하게 되였단다.

그는 날마다 두만강 근처에서 군인들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경비를 서는 가? 를 살펴 두었다가 어느 날 밤에 자신이 보아두었던 오솔길로 두만강으로 나왔다고 한다.
오래 동안 보와 두었던 곳이라 경비가 없을 줄로 알고 강가로 내려오는데 어데서인지 갑자기 군인들이 달려오면서 "서라'고 소리치더란다, 청년은 오래 동안 중국에 가려고 결심을 굳혔었고 두만강까지는 멀지 않은 지척이라 죽기내기로 두만강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리였다고 한다.

몇 발자국만 앞으로 가면 두만강인데 갑자기 앞과 옆에서 검은 무리가 나타나더니 옆에 있는 자가 자기를 그러안고 앞쪽에서 오던 자가 총탁(개머리판)으로 자기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고 한다. 청년은 눈앞이 새까맣게 되면서도 여기서 잡히면 죽는다, 는 한가 지 생각밖에는 아니 나더란다. 청년은 자기를 그러안고 있는 자를 있는 힘을 다하여 밀쳐버리고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만강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고 한다. 강물에 뛰어 들어서도 제정신이 없이 앞으로만 힘껏 달리여 구사일생으로 중국쪽 강기슭에 나와 보니 온몸에 피가 질벅하게 배여 있더란다. 청년은 자신이 두만강을 건너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서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었다고 하며 씁씁한 표정을 짓는다.

2006년 12월 누군가로부터 한국으로 가기를 바라는 한 여성이 있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였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 가서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면 도와드릴 수 있으니 연길로 데려오라고 하였다. 연길로 나온 여성은 키가 작고 다부지게 생겼는데 말을 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보인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탈북자들이 있는 피난처로 가서 주의할 사항들을 알려준 후 탈북자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것을 잘 배우라고 하였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그녀는 다른 탈북자들과도 잘 어울렸고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 북송 되여서 고생을 하다가 다시 중국에 나왔다고 한다, 나도 탈북자이고 두만강을 넘어온 사람이지만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넘는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 생각하여 보면 그 위험한 곳으로 어떻게 넘어오는지 궁금하여 두만강을 어떻게 넘었는가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북한 감방에서 여윌대로 여윈 몸으로 나왔지만 어데 가서 몸을 의지하고 추스릴데도 없고하여 다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오기로 생각을 하였단다. 그녀는 출소하여 몇 일만에 두만강 국경 경비대의 잠복초소가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깊은 밤중에 어둠을 이용하여 기여서 두만강을 건널 수가 있었단다. 중국으로 가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강물을 헤치고 넘어온 것이 두만강 가운데 있는 중국쪽 섬이였다. 이곳에는 중국인들이 건너와서 옥수수 농사를 하고 있었으며 가을이 되면 옥수수를 다락에 넣어 말리면서 한편으로는 배를 이용하여 옥수수를 중국으로 가져가는 작은 섬이였다. 탈북에 성공한 그녀는 섬에 있는 농가로 찾아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탈북녀를 맞이한 한족 주인은 그녀를 데리고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서 먹을 것을 주고는 밖으로 나와 말같이 큰 개를 풀어서 탈북녀를 물어뜯게 하였다. 주인의 손에서 풀려나온 사나운 개는 그녀를 덮치듯 달려들어 온몸을 물어뜯어 놓았다. 북한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서 며칠밖에 안 되는 그 여위고 여윈 탈북녀는 사나운 개에게 물려 뜯기여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여 그만 정신을 잃고 쓰려졌다고 한다.

짐승도 낯을 붉힐 천하에 못된 중국인 한족 주인놈은 어떻게 하나 목숨만을 건져 보려고 살길을 찾아 사픔치는(거세차게) 두만강을 건너온 연약한 탈북녀에게 인간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면서 탈북녀가 개에게 물려 뜯기는 것을 감상하고 있던 것이다. 중국인 한족 주인놈이 탈북녀에게 사나운 개를 부추겨 물어뜯게 한 것은 자신이 북한 경비대 군인들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하여 같은 조선 사람이라고 하여 탈북녀에게 개를 부추겨서 복수를 하였던 것이다. 두만강 가운데 자리 잡은 이 섬은 북한과 가까운 곳이라 섬 맞은편에 있는 북한 국경 경비대 군인들이 가을이 되면 시도 때도 없이 중국섬으로 건너와서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끊임없이 도적질 하여 갔다고 한다.

열이 도적을 하나 못 지킨다고 계속하여 반복되는 북한 군인들의 로략질에 약이 오를 때로 오른 중국인 한족 주인 놈은 언제인가는 반드시 북조선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리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탈북녀는 북한 군인들의 끊임없는 로략질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주인 놈의 복수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겪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다리에 남아있는 개에게 물린 상처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며 증오로 몸을 떨고 있었다. 눈물로 자신이 당한 끔직한 사연을 우리에게 호소하는 그녀의 몸에 남은 상처는 개에게 물렸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험악하여 보였으며 그 상처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는 죽어서도 잊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였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언제인가는 탈북자들의 수난사를 고발할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이야기 일부를 녹화를 하여 놓았었다.

2007년4월경 나는 잘 알고 지내던 조선족분의 집에서 한 여인을 만날 수가 있었고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탈북자 오누이가 있으니 그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라고 한다. 나는 일정한 주기로 다녀서 곧 이곳에 오기는 힘들 것 같아 오누이를 연길에서 만나볼 수가 있으니 함께 연길로 오라고, 그러면 내가 만나보고 결심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언제쯤에 만나면 좋겠다고 하였다.

몇일 후, 그녀는 오누이와 함께 연길에 왔으니 나를 만나보자고 한다. 나는 급히 연길 북대의 작은 다방에서 그들을 만날 수가 있었으며 내가 만나본 여인이 탈북자이고 그녀가 말하던 탈북자 오누이중 누이가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북조선에서 왔다는 것이 들키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어데를 가나 중국인 행세를 하고 있었으며 한 고장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면서 정체를 교묘히 숨기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훈춘에서 살 때 중국돈 5000원씩 소개비로 주면 한국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여 돈을 준비하고 있는 때에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 나에게 한국으로 데려다 달라고 간청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선에 어데서 살았고 언제 중국에 왔으며 등 여러 가지로 물어보면서 두만강을 넘어올 때에 누구와 함께 강을 건너왔는가고 물어보았다. 탈북녀는 성격이 쾌활한 편이라 말도 시원스레 잘 하였고 함께 온 남동생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남동생은 누나와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보였고 내가 안하면 누나가 다 말하여 주겠지? 하는 생각인 것 같다.

나는 그들의 말을 통하여 이들 한 가족 4명이 함께 북한에서 집을 떠났으며 두만강을 건널 때에 누구인가 물에 휩쓸리는 것을 아버지가 건져주고는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캄캄한 밤에 소용돌이치는 물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을 지켜주고 다시는 물위로 올라 올수가 없었다. 탈북녀네는 어둠 속에서 아버지를 찾고 또 찾아보았으나 아버지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두만강을 도망강이라 불렀다. 살길을 찾아 북으로, 북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들 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두만강을 넘어보려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가려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두만강 연안에 이중 삼중의 경계를 펴고 있다. 로동자 규찰대. 경비대 군인들의 순찰과 촘촘히 파놓은 흙구덩이 잠복초소에서는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고 체포하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두만강을 지켜서고 있다. 낮과 밤이 따로 없는 탈북 대렬을 막아보려고 군인들은 온밤을 초소에서 눈을 밝힌다. 하지만 그네들이 그렇게 삼엄하게 경계근무를 서도 삶을 향한 탈북의 대렬을 막을 수가 없었다. 두만강은 원한의 강이다. 그 강물 속에 휩쓸려 다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몇이고 총탄에 숨진 자 가 몇인지 아무도 모른다. 두만강아, 원한을 품고 떠나간 영혼들을 고이 달래여 주렴.

탈북자들의 북한 탈출은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여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야할 앞길에는 더욱더 험악한 그 무엇인가가 수많이 기다리고 있다. 2004년 4월경, 화룡지역에 간 나는 멀령에서 살았던 여인으로부터 화룡시 룡성향(당시에는 부흥향이라 불렀음)룡서촌에 부모가 없는 여자애가 중국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와서 지금까지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였으며 어머니는 북한에 잡혀갔는데 중국인 아버지가 아이를 하교에 보낼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룡서촌에서 살아본 경험은 있지만 그곳에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하여 다는 모르고 있었고 그곳에 있는 주민들이 나의 얼굴과 이름도 알고 있으니 나는 날이 어두워지면 함게 북한 여자애를 보러 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함께 화룡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밤이 깊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그녀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룡서촌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 여자애의 중국인 아버지는 그녀의 먼 친척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녀에게 탈북 여자애의 중국인 아버지가 동의한다면 탈북 여자애를 청두에 있는 소학교에 보내고 그에 필요한 모든 학자금과 아이의 생활비를 후원하여 주겠다고 말하였다.

어둠이 짙어서 우리는 함께 택시를 타고 룡서촌으로 향하였다. 먼발치에서도 내가 그전에 살아왔던 마을 전경과 그곳의 어느 곳은 누구의 집이고 누구네 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등 여러 가지 지나온 날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나는 함께 간 여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을 입구에 있는 한 집으로 찾아들어 갔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집 주인은 내가 첫눈에 알아볼 수가 있는 중년의 남자였고 부인은 아마 누구네 집에 노름을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방안에 들어가며 살펴보니 그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내가 여기서 노예 살이를 할 때 이 집의 고추모 옮기는 일을 하루 동안 하여 본적이 있었다. 주인집의 고추밭은 마을 앞 장대에 있었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고추를 심고는 점심을 이 주인집에서 먹은 적이 있었으며 이집 주인은 남들처럼 술을 많이 마시고 도박을 한다거나 게으르지 않았고 성품이 고상하고 우리 탈북자들에 대하여 불쌍히 생각하고 있은 분이라 나는 주인님과 부인을 기억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함께 그동안 살아오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 있으니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나를 안내하여 오시던 여인이 조그마한 어린 여자애를 손잡고 문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애는 추워서인지 옷을 두툼하고 입고 있었으며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방안의 여기저기를 아무런 꺼리낌 없이 살펴보면서 방안 한쪽에 자리 잡고 앉는다. 아마 이집에 자주 다니던 아이인 것 같았다. 나는 여자애에게 네 이름이 뭐이지? 하고 물어보니 이름은 향미이고 13세살 이라고 대답하며 무엇인가 귀찮아 하는듯한 표정이다. 내가 향미를 오라고 하자 향미는 별 주저 없이 나에게 온 것을 무릎에 앉히고 너 공부하고 싶지 않니? 물어보니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단다. 향미도 내가 보아온 탈북 어린이들처럼 양기가 없었고 요즘은 어머니가 없으니 아버지가 어데론 가 나가면 향미는 혼자서 마을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놀고 있단다. 하얀 얼굴의 향미는 친구도 없고 공부도 못하여서인지 유치원 아이들 정도의 사유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있는 집 주인은 향미 어머니가 향미를 데리고 중국에 온지가 몇 년이 잘 되였으며 2003년 11월경에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 되였는데 향미는 마침 바깥으로 놀려 나가서 잡히지 않았으며 향미 아버지는 향미 어머니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껏 소식이 없단다. 향미는 돈만 있으면 청두 소학교에 보내여 공부를 시킬 수가 있는데 향미네 아버지가 정부보조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니 학교에 보낼 엄두도 못 내고 있단다.

집주인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에 웬 남자가 술에 취하여 우리가 있는 집에 들어오자 곧장 향미를 오라고 소리치더니 집으로 가자고 야단법석이다. 집주인님이 방에 들어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 가라고 하여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키가 조금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얼굴에는 수염을 언제 깎아 보았는지 수염이 덥수룩하고 깊고 굵은 주름만 보이는 것을 보아서는 고생 꽤나 한 것 같아 보였다. 향미의 아버지는 누구네 집에 가서 술을 얼마나 마셔댔는지 자기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욕설을 끝없이 하면서 우리 향미는 내가 잘 알아서 키울 것이니 당신들은 절대로 향미에 대하여 말하지 말란다.

그날 밤 혼자서 산길을 타고 화룡으로 돌아오면서 아이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여 보았다. 술을 제 정신 없이 마셔대고 일을 하지 않아 정부 보조로 살아가면서 아이에 대한 교육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여 보는 아버지에게 아이를 그대로 맡겨버리면 향미의 앞길은 불을 보듯 하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나는 향미의 어머니가 다시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들어오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향미어머니가 재 탈북을 하여 중국에 들어올 때 맏아들 명일이를 함께 데리고 왔으며 어머니가 사망하자 중국인 남편은 아이를 두 명이나 맡게 되면서 힘들어한단다. 나는 향미를 데려 오고 싶어도 한번 당하고 난 후로는 그가 자발적으로 어린이들은 내여 놓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향미 어머니가 없으니 향미나 명일이가 고울리 없었고 아버지는 날마다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욕설을 하면서 누구인가 아이들을 하루 빨리 데려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소식이 나에게로 왔다.

나는 향미 아버지가 지금 누구인가 아이들을 맡아 키워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될 때에 토산에 계시는 분들을 룡서촌으로 보내면서 아이들을 데려올 때 중국인 아버지에게 아이들을 키우느라 수고 하였다고 인사하라고 중국돈 300원을 쥐여 주면서 룡서촌으로 떠나 보내였다. 오후 늦은 시간이 다 되여 룡서촌으로 가셨던 분들이 향미와 명일이를 데리고 화룡으로 오자 나는 아이들의 옷과 가방을 사서 새로 입힌 후 곧 연길로 향하였다.

연길시 연길 감옥 옆에는 우리의 피난처가 있었으며 향미와 명일이는 그곳에서 일군들의 보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2004년 9월 10월경에 향미의 중국인 아버지는 아이들을 떠나보낸 후에는 날마다 술로 자기의 마음을 달래며 살아가던 중에 타락하였으며 결국 그해 가을경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자살을 함으로써 화룡에서 소문이 나돌던 룡성향 룡서촌의 향미의 중국인 아버지 김금산이 였다. 죽기 전에 그는 유서를 남겨 놓았으며 유서에는 안해(향미의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으며 안해가 죽자 절망 속에 몸부림치다가 목숨을 끊게 되였다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향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북한 량강도에서 살았으며 생활이 어려워지자 향미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짜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중국인들에게 팔고 돈을 받으면 어머니가 도망쳐 나와서 다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중국인들에게 팔고 도망가는 연속극을 하다가 향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인신매매범으로 체포 되였으며 몇 년을 감옥생활을 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공개 총살되었다고 한다. 향미의 어머니는 경찰에 잡혀서 강제 북송될 때에 임신 2개월이였고 북한에서 임신여부 검사를 할때에 용케도 자리를 모면하여 낙태는 면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향미의 어머니는 몇 달간의 구류장 생활 속에 몸이 많이 못쓰게 되였지만 이번 길에 다시 중국에 간다면 맏아들 명일이를 데리고 함께 중국에 가려고 생각하고 외할머니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던 명일이와 함께 탈북 브로커의 도움으로 두만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두만강을 넘어 올 때에 4명의 일행이 함께 강을 건너서 중국쪽으로 넘어온 다음에는 산발을 타고 화룡시 차장 근방까지 올수 있었단다.

그들 일행이 산 밑으로 내려올 때에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나타나자 자기들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급히 몸을 숨기려고 하다 향미의 어머니는 작은 구렁텅이에 빠져 넘어지게 되였다고 한다. 향미의 어머니는 임신 8개월이었고 구렁텅이에 넘어지면서 출혈(하혈)을 시작하였지만 경찰에 잡히면 아니된다는 생각으로 일행들은 다시 산으로 오르기 시작 하였단다. 몇 시간이 넘도록 출혈이 멈추지 않고 향미 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하여 졌다고 한다.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었는지 향미의 어머니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살던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면서 그곳에 가면 김금산이라는 남편이 있다는 것과 딸 향미가 있으며 자기가 살것 같지 못하다고 전하여 주라고 하였단다. 안내하던 분이 룡서촌에 있는 김금산과 함께 탈북자들이 숨어있던 산위로 찾아갔을 때에는 향미의 어머니는 이미 자기의 세상으로 떠나갔었다.

향미의 아버지는 마을에 돌아와서 안해의 묘를 만들어 주고 돌아 왔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향미의 아버지는 탈북자들과 함께 산위를 내려 온 후로는 다시 산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 향미의 어머니가 출혈을 시작하여 몇 시간이 되여 안내자는 향미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려 떠났으며 향미의 어머니는 새벽 두 시경에 운명을 하였다고 한다. 명일이는 온밤을 어머니 시신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안내자와 향미 아버지는 아침이 다 되여서 산위로 올라 왔단다. 향미의 어머니 시신은 이미 굳어져 있었으며 향미의 아버지는 어머니 시신을 끌어다가 나무 덩굴이 우거진 움푹하게 패인 곳에 눕힌후 준비하여 가져간 낡은 담요를 향미 어머니 시신 위에 덮어주고는 주변에 있는 나무 가지들을 주어다가 어머니 시신을 덮어놓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기의 딸 향미를 그리면서 위험을 헤치고 중국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을 맞아준 것은 죽음이라는 참혹한 현실이였다. 차장에서 화룡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조금만 더 갔더라면 그녀는 자기의 사랑하는 딸 향미를 만날 수가 있었을 것이며 수년간을 헤어져 살아온 오빠와 향미의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의 만남도 가슴 가득 흐뭇하게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단란한 가족들과의 삶을 그리며 온갖 위험을 뚫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중국땅 어느 곳에선가 사랑하는 자식을 옆에 놓고, 헤어진 향미를 그리며 소리 없이 숨져 가고 있을 때 무엇을 생각 하였을까? 향미어머니의 죽음은 중국 땅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의 삶의 한 부분 일 것이며 우리가 모르는 비참한 죽음들은 그 얼마나 많을 것인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