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1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1

유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아직은 다 말할 수가 없지만 제가 일한 것의 몇 부분을 사실대로 글을 올리니 탈북자구출을 계획하시거나 중국에 계시는 탈북자 분들 중 한국오시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탈북자들은 나를 브로커라고 부른다.

나는 한 시간 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우리 일행들의 상태만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따라 열차에 사람이 많아 우리 일행은 한곳에 모여 앉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널려 앉아 있었고 그래서 더욱 일행 한사람, 한사람의 안전과 그들의 심리상태에 신경이 쓰였다. 나와 가까이에 앉은 은심은 편안한 표정에 그 무엇인가 희열에 넘치는 듯한 미소가 가끔씩 얼굴을 스쳐지나갔고 영옥은 불안한 기색에 약간 붉으스레한 얼굴은 더욱 검붉게 느껴졌다. 조금 떨어진 창가에 앉은 갈량은 아무생각도 없는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8월초의 사막은 이름을 알 수없는 풀들이 여기 저기 자라고 있었으며 작은 꽃망울들이 한껏 피어올라 드넓은 사막은 하얗게 단장되어 있었다.

이제는 핸드폰 검사도 끝나고 사탕도 스무 알 정도씩 나누어 주어 주머니에 넣게 하였으니 그런대로 잘 되여 가는 것 같은데 여자들이 옷이 야단이다. 내가 떠날 때 준비한 옷은 입지 않고 날씨가 더우니 가다가 선생님이 옷을 갈아입으라면 갈아입겠다고 대답하고는 열차를 타기 전에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하였지만 갈아입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들이 야속하였고 단호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열차에서 옷을 갈아 입을 수가 있지만 그렇게 되면 주변사람들의 의심을 살수가 있어 미리 이야기 하였지만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할 수없이 여자들에게 차례로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른 곳에 가서 앉으라고 이야기 하였지만 열차에 사람들이 많고 종착역이 가까운지라 사람들이 붐벼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열차는 서서히 종착역에 들어서고 나는 은심이 손을 잡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영옥과 갈량이는 부부처럼 우리 뒤를 따라 왔다. 그전에는 구역사로 나갔는데 오늘은 신역사로 나가는 것이 분위기가 엄해보였으나 모두들 잘 빠져나왔다. 역전 밖으로 나와 보니 생각보다 엄청 많은 택시들이 역전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우리는 택시사이를 돌고 돌아 도로가에 나왔다.

나는 일행을 점검하고 특히 여자들에게 옷을 바로 입으라고 주의를 주고는 곧장 공중전화소로 향하였다. 그곳은 내가 일이 끝나면 한국에 전화하기 위하여 늘 이용하였고 로반(사업가)이 년세가 많은 한족분인데 내가 손짐을 맡기고 찾으러가서 값을 치르면 받지를 않고 언제나 밝고 소탈한 웃음으로 다시 오라고 바래주던 곳이었다.

이제 손짐을 맡기고 건설장에 가서 나갈 곳을 정찰한 다음 시장에 가서 슬슬 돌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10시 30분이면 국경선을 향하여 출발하면 된다. 이곳에서 6키로 미터 가면 몽고땅이다. 여기서 생사운명이 갈라지는 것이다. 나는 영옥과 갈량에게 3-4미터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라고 하고는 은심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내가 공중전화소의 문을 열어보니 책상과 전화기가 모두 없어지고 폭격 맞은 집 같았는데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스산하고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내가 길가에 다시 나오니 은심이가 옷을 앞으로 하고 두 팔을 낀 채"선생님"하고 큰소리로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옷차림이 우스꽝스럽고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천진스럽고 귀여웠지만 나는 그를 외면한 체 옷을 똑바로 입으라고 면박을 주고 함께 걸었다.
이곳은 마지막 국경지역이라 옷차림과 손 짐까지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일이 살펴보아야 하기에 나도 작은 가방에 갈아입을 속옷 한 벌과 간단한 세면도구, 확대경과 군용라침판. 볼펜과 연필 한 자루가 전부였으며 그것도 기차에서 내리면 곧 손 짐으로 맡기곤 하였다. 손 짐을 여관에 맡기자, 그곳의 주인아주머니가 생긴 것처럼 상냥하고 인심이 후하다. 그리고 신분증을 보자고 아니하고 값도 비교적 싸다.
우리가 여관으로 향하고 있을 때 길가에 한 남자가 자기네 여관에 들란다. 중국에서 늘 보아오는 호객행위로 보고 나는 생각 없이 볼일이 있다고 대답하고 가는데 또 다른 사림이 자기네 여관에 들란다.  나는 그에게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가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몇 명의 남자가 영옥이와 갈량이를 붙잡는 것이다.

아, 무엇이 잘못되었구나,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무엇이 나를 뒤에서 덮치듯 끌어안는 것이였다. 은심이 뒤에 있던 키가 큰 남자가 어린새 마냥 가냘픈 은심을 와락 잡아당기면서 끌어안는다. 은심은 찍소리도 못하고 얼굴이 새까많게 질려버려졌다.

나의 등 뒤에서 네가 북한을 도주하여 한국가고 지금 탈북자 나르는가?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본능적으로"쩐머즈도?"'(어떻게 아는가?)고 물으니 조선족이 고발했단다. 바로 나의 앞에서는 은심이가 자기는 조선족이라고 딱 잡아떼면서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힘껏 몸부림 치고 있다. 상상도 못할 모든 일들이 순간에 일어난 것이다. 이미 대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베코 중형 버스가 금방 우리쪽으로 와서 강제로 일행들을 마구 잡이로 밀어 붙혀 차에 태운다.
버스는 내가 여러 번 정찰한 경험이 있는 골목길을 따라 서서히 가더니 이련호특 변방공안 지대(변방대)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변방대는 그전에 보아왔던 것보다 실제로 더 규모가 컸으며 두 번째 다층건물 2충에 있는 어느 한방으로 들어갔다. 방 가운데는 2층 철제 침대가 질서 있게 배렬되여 있었으며 서쪽면은 사물함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있는 옷과 신발에 오른 먼지로 보아서는 방은 아마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창밖으로는 우리 일행들이 빠져 나가기로 예정된 도시 골목길과 드 넗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방안에 들어온 장교가 나에게 신분증을 달라고 하게에 순수히 여권을 내밀었더니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가고 묻는다. 조금있으니 나를 그러안았던 자가 들어오더니 자기방으로 가잔다. 그의 방은 바로 옆방이었으며 편수책상 한 개와 두개의 소파가 있고 어떤 남자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빤히 쳐다보면서 담배를 들이 빨고 있다. 그는 장교에게 기다렸던 것처럼 이 사람인가고 묻고 장교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는지 중얼거리고 있다.

나는 소파에 앉은 남자에게 중국어로 네가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고 물으니 자기는 조선족이며 연길에 살다가 장사하기 위하여 이련으로 왔으며 이름은 허영호라고 한다. 책상을 가운데로 하고 장교와 내가 마주 앉고 거의 기계적인 질문을 거침없이 하고 나도 대체로 사실 그대로 순순히 대답하였다. 나는 조사가 끝날 무렵 장교의 신분을 물어보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니 빠른 시일 안에 한국대사관에 소식을 통보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장교는 이 부대 안전 담당책임자이며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싸이한 타라(이련남쪽 120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에 군인들을 보냈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들어 왔다고 한다.
내가 이자들이 왜 탈북자 잡지 못하여 안달이냐고 묻자 그는 지난 (2007년) 3월12일에 중국정부에서 국경경비를 강화할 데 대한 지시가 내려왔으며 훌륭치(만주리 근처의 작은 마을) 변방대 책임자가 탈북자를 많이 잡아 10개월 만에 한 계급 승진하였으며 오늘은 한국사람 잡았으니 작은 상품이나 상금이 있을 거란다.

장교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개의치 않고 무엇인가 열심히 쓰는 것 같더니 밥을 먹었는 가고 묻는다. 나는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식당에 식사를 주문할터이니 함께 가서 식사하잔다.나는 밥 먹을 생각이 없고 우리 사람들이 배고파 중국에 왔다가 이 봉변을 당하였으니 우리 일행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수감소로 가는 도중에 어둠을 이용하여 주머니에 있는 돈 전부를 통역에게 주면서 준비해준 전화번호에 급히 소식을 전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수감소는 ㄴ자형으로 철제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왼쪽으로 철제 대문이 있는데 그것을 열면 복도 좌우로 7-8개의 철문둘이 있는 것을 보면 첫눈에 이것이 구류장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감방은 25평방미터 정도 되였으며 흔히 북한 농촌 문화선전실 형태로 방바닥이 되여 있었으며 한쪽 벽면에는 이부자리가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었고 세면대와 변기 그리고 천정에는 CCTV가 설치 되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경비병이 쉴 사이 없이 거닐면서 방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체포되는 순간에 당황스럽다가 안정되는 것 같았는데 감방에 들어오니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수가 있나? 정말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빨리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제 막 시작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나의 몸에는 몽고에 보내는 몽고어로 된 소개신과 2개의 전화 카드, 전화수첩이 있었다. 전화카드에는 중국 그리고 북한과 교신한 전화번호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것이 군인들에게 넘어가면 많은 분들이 상하게 되여 있었다.

나는 전화카드를 끊어서 변기 안에 넣고 전화번호수첩에서 중요한 전화번호가 기록된 것은 종이채로 뜯어내어 한참 비빈 후 몽고 소개신과 함께 변기에 넣고 물을 흘려보냈다.
우리가 잡힐 때 손가방과 전화기만 빼앗기고 나머지는 몸에 있었기에 정말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한참 엎드려 "주여,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내가 죄인이니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정말 간절히 찾고 또 찾았으며 부르짖었다. 기도하고 일어나 방안을 거닐고 그래도 조금도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저 멀리 남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막의 밤하늘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밝고 밝은 별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갈하고 아름답게 보이는지 정말 아름다음의 환상세계 같았다.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주여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늘 기도하고 어려울 때 매여달리고 찾은 나의 하나님이었다. 나는 탈북자들에게 말한다. 나는 선교사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려울 때 찾고 의지하고, 우리 함께 하나님을 믿고 반드시 승리하자고...

탈북자의 3국 탈출은 문제도 아니다 조금 있으면 새로운 길을 열면 그때는 보다 안전하게 그리고 더 많은 탈북자들을 탈출시킬 수 있다. 그런데 재정이 문제다. 이제는 재정적 여유도 없고, 한 사람당 평균 30만원 정도만 회수 하여도 얼마든지 일할 수가 있다. 문제는 북한이다. 마음대로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으로 매수하는 방식은 싫었고 또한 인위적으로 하기도 싫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자면 의지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키우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이고 모든 것이 윤곽이 드러나 일할 수 있게 되였는데 여기에만 몇 년의 품을 넣었다. 북한, 북한만 생각하고 너무 많은 품을 넣은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원통한 것이다.

은심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나는 경비병에게 누가 우는 가고 물으니 눈만 흘기면서 가버린다. 조금씩 울음소리는 커지더니 통곡으로 변하고 만다. 아마 은심의 울음소리인 것 같다. 어찌 그러하지 않으랴. 은심은 19살에 산동성 청도에 팔려갔다가 도주하여 연변으로 오다가 경찰에 잡혀 북송되었는데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정말 북송이라면 죽기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다. 아, 내가 죽을죄를 졌구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먼동이 터오면서 은심의 목소리가 들여온다. 아마 장교의 감시 밑에 복도 청소를 하는 것 같다. 얼마 후 복도청소가 끝났는지 창밖에서 마당을 쓰는 은심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장교에게 내가 청소를 할 테니 은심을 들여보내라 말하니 장교는 그럼 령도(중국에서 책임자에게 령도라고 말할 때도 있음)가 나와서 하란다. 내가 청소를 하면서 보니 마당은 너비10미터, 길이 25-30미터 정도 되였으며 3메터 높이에는 25미리 철근을 그물형태로 엮어 덮어놓아 그 무엇이든지 그곳을 빠져 나갈 수가 없게 되어있다.

나의 옆방에는 갈량이와 1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청년이 있고 그 다음 방에는 영옥과 30세 초반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있었는데 몹시 허약하고 얼굴이 창백한 것이 그 어떤 병으로 많이 고생한 것 같았다. 아침이 되자 나를 조사하던 장교를 비롯하여 많은 장교들이 몰려와 나와 우리 일행만 따로 불러 내여 나와 갈량이에게는 손에는 수갑을 발에는 족쇄를 그리고 수갑과 족쇄사이를 사슬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아마 짐승도 그렇게 묶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은심이와 영옥의 손에 쇠사슬이 달린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 수감소에는 다른 탈북자들과 조선족도 있었지만 저의 일행만 따로 불러내어 어데론가 끌고 가려고 하니 얼굴이 발그스레한 영옥의 얼굴은 검푸르다 못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용서를 빌며 차에 올랐다. 영옥과 은심이 바로 앞에 ,그들을 조금이나마 위로를 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나의 옆과 앞에는 젊은 장교가 앉았고 책임자인 듯한 장교는 차에서 일체 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조금 후 차는 서서히 골목길을 빠져나와 늘 보아온 거리를 누비며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도시밖에 정규 간수소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집녕이나 호화호특으로 가겠지. 그 다음 일을 알 수가 없다.
우리를 태운 차는 도시밖에 있는 간수소는 거들떠보는 것  같지도 않게 달리더니 드디어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벌써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점심시간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 시린궈러멍 변방공안총대(변방대 사령부격)였다. 총대는 넒은 부지에 여러 개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정원수도 잘 구비되어 규모 있게 느껴졌다. 우리가 총대 본관 앞에 도착하자 많은 장교들이 건물현관 앞에서 서성대다가 우리 일행 한사람에게 장교 3명씩 따라붙어 주변부속 건물 쪽으로 제각기 흩어져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또 그들과의 만남이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져 두려움마저 들었다. 이어 몇 명의 장교들이 나를 에워싸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 어느 한 방에 들어가게 되였다. 방안은 널찍하고 두개의 량수 책상을 마주 붙여 놓은 것과 소파가 있고 소파 옆에는 밑에는 철궤가 달린 책장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일반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컴퓨터와 서류인 듯한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책장 옆 옷걸이에는 남녀 경관 정복이 모자와 함께 걸려 있었는데 장식으로 보아 급이 높은 자의 옷 같아 보였다.

나를 호송하고 온 책임자와 5명의 장교가 나를 에워싸고 무엇이라고 말을 주고받더니 젊은 장교 한명이 1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나의 옷을 일일이 흩어보며 검사를 시작하였다. 겉옷은 물론 속옷과 허리띠 재봉 솔까지 샅샅이 흩어본 다음 신발깔창을 뽑아내고 들여다보고 손으로 문질러 보고 신발 밑바닥도 깐깐하게 들여다보며 검사를 하였다. 모든 소지품 검사가 끝난 다음 화장지 한 장과 소개신을 나의 앞에 가져다 놓으며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 가고 물어본다.
화장지는 내가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여 다오, 희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라는 글을 썼던 것을 오늘 낮, 차에서 은심이가 소리 없이 계속 울음을 울기에 내가 글이 쓰여 져 있는 화장지를 은심이에게 주었던 것을 군인들이 빼앗아서 가져온 것이다. 소개신에는 몽고어로"우리는 난민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고 대한민국 대사간으로 보내주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내가 그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신 하나씩 주었지만 지금은 한 팀에 한 장씩만 준다. 그것도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빠져나갈 통로를 확실하게 습득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에게 주면서 조를 이끌도록 하며 전화기도 통화키만 누르면 서로 연결되도록 준비시켜 떠나보내곤 하였다.

이번에는 영옥에게 소개신을 주면서 어떤 경우에도 소개신이 중국군인들 손에 들어가면 아니 되니 먹어서 없애든가, 아니면 비비서 던져버리라고 하였다.  다른 팀들에서 여자책임자에게 소개신을 주면 그것을 꼬깃꼬깃 접어서 가슴이나 허리춤 어데다 숨기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영옥이가 소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지 못하였다. 그것이 지금 군인들의 손에 들어가서 나의 앞에 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서툰 중국어로 설명하여 주었고 통역이 오면 확인하여 보라고 하였다. 일차적인 것이 끝났는지 그때야 점심이라고 가져온 것이 밥을 미역국에 말아서 커다란 그릇에 담아 나의 앞에 내놓으면서 밥을 먹으란다. 나는 밥 먹을 생각이 없다, 우리사람들이 어제 저녁도 못 먹고 아침도 굶었으니 그들에게 식사를 공급하여 달라고 하였다. 아마 한국인이 처음으로 개죽처럼 밥을 만들어 가져다주면서 먹으라니 심술을 부려서 안 먹는다고 판단하였던지 이번에는 제대로 밥 따로 국 따로 담아다 빨리 식사하란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지금은 밥 먹을 정신이 전혀 없으니 괞찮다고 하였다.
소지품 검사를 하던 젊은 장교가 가고 이번에는 덜 익은 것 같은 여자가 들어왔는데 그가 통역이란다. 질문은 어제 밤에 있었던 것과 똑같이 한국 어느 곳에 살고 언제 중국에 왔고, 무슨 차편으로 중국에 오고 등 일반적인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한 다음 군인 두 명만 남고 다 어디론가 가버린다. 나는 함께 있는 장교들에게 그들은 죽음을 피하여 중국에 온 난민이며 그들은 반드시 저와 함께 한국에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만약 그들이 저와 함께 한국에 가지 못한다면 나도 북한에서 나서 자랐으니 북한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던 장교는 황당하다는 듯 아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들의 말하는 품을 보아서는 탈북자들을 상당히 많이 대상하여 본 것 같은 느낌이 육감적으로 느껴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장교에게 나의 가방 안에 성경책이 있으니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니 군말 없이 성경을 가져다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성경책을 펼쳐들고 보려고 하였지만 도무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열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많은 시간을 무료히 보낼 수는 없고 하여 나는 늘 자그마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보군하였다. 성경을 보고는 싶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볼 수도 없고 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데 조사국장 수잉지(소영길)가 들어와 장교에게 상점에 가서 무엇을 사오라고 한다. 이번에는 음료두병과 그릇에 포장한 라면을 한 그릇 가져다주면서 먹으라고 한다. 나는 먹고 싶지 않으니 탈북자들에게 가져다주라고 하니 이번에는 뭐라 욕설을 퍼붓는다. 수잉지는 한참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내려가자고 하여 따라가니 이미 갈량과 영옥이, 은심이 모두 다 있었다. 수잉지는 통역관에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들과 두서너 달 구류장에서 함께 생활하면 한국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하면 좋다고 하면서 반드시 우리일행이 모두 한국에 함께 갈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우리는 다시 족쇄와 수갑에 묶여 차를 타고 이송을 하여 시린호터시 간수소로 가게 되였다. 시린호터는 내몽고 자치구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자그마한 도시로서 도시외곽에 간수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정말 그들이 바라는 한국으로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수감자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두들 옷을 갈아입고 각자 다른 방으로 나뉘어져 가면서 언제인가는 반드시 좋은날을 만나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나는 간수소 2구역 12호 감방에 배치 받았다. 감방은 출입문이 있고 철창문이 있는 형식으로 이중문이었으며 6명위 수용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감방 안에 들어서자 머리를 박박 깍은 수감자들이 출입문 쪽으로 우르르 밀려와 웬 놈인가?하는 호기심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중국어로 나는 한국 사람이고 중국어를 잘 못하니 잘 도와달라고 말하자 몸집이 뚱뚱한자가 한국어로 한국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왜 여기에 오게 되였는가? 등 여러 가지 줄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탈북자들을 몽고에 보내다가 잡혀서 여기에 왔다고 하니 자기도 탈북자들을 한국에 많이 보냈다고 하면서 지금 이 간수소에도 장미숙이라는 탈북자 출신 한국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임철이 그리고 누구누구를 아는가? 한국으로 간 탈북자들이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단다. 나는 임철이는 내가 알고 그 사람이 부탁한 탈북자들을 몇 차례 한국에 보낸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여 주었다.

 

2006년 말경에 나에게 누군가 전화로 자기가 탈북자들을 도와주는데 한국에 데려다 달라고 하게에 내가 한국으로 가서 열심히 살겠다는 분들은 내가 도와드릴 수 있다.하지만 내가 데려온 사람들에게서 몇 백 만원씩 돈을 받으면 나는 도와드릴 수가 없다고 하니 자기도 탈북자 지원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월에는 전화로만 연결하여 몇 명을 몽고에 보내고 2월에는 22살짜리 아가씨가 있는데 영구에서 혼자 떠나보내겠다고 하여 나는 아가시를 반드시 보호자를 붙여서 보내며 보호자 없이 혼자 보내는 경우에는 내가 받지 않겠다고 하니 그때 임철이가 성순이를 데리고 연길에 와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본 성순은 22살 아가씨인데 얼마나 키가 작은지 .꿰진 들가방을 들고 내가 80리를 걸어가야 한다고 하니 자기는 150리도 걸어봤단다. 키는 작아도 담찬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실은 40리만 걸으면 되지만 나는 그녀의 정신적 준비상태가 어떠한가 알아보려고 80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나는 성순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 신발과 가방을 사주고 생활비를 주면서 먹고 싶은 것은 자체로 사다가 식생활을 하되 이제부터는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우리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늘 기도하라고 일러주었다. 성순은 피난처에서 훌륭하신 분의 도움으로 성경공부도 하게 되였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