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경험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경험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김 혁
가톨릭대 국사학과 3학년

* 몽골을 경유, 2001년 9월 홀로 한국생활을 시작한 김혁 학생은 좌충우돌 속에서 여러가지 깨달음과 주위 사람들의 배려를 통해 꿋꿋하게 최선을 다해 대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직접 에세이로 독자 여러분과 본인의 남한 생활을 나누고자  뉴스레터 120호-122호(08. 2.-5.)까지 3회에 걸쳐 연재한 것을 올립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나또한 그 사람들 안에 속해있는 하나의 사람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상대적이고 지금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내가 남들보다 특별히 더 어려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또한 참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시련에 부딪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련에 절망하기 보다는 그 시련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계획하면서 이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또한 처음 시련이 닥쳤을 때 주변의 격려나 조언에 ‘말은 쉽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힘들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이겨내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주변에서 도움에 손길을 내밀어도 쓸데없는 자존심에 오기만 부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움을 빌어서라도 시련을 극복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뻔뻔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한다.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지만 어려움을 극복한 후의 상황과 도움을 주신 분에게 보답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리고 남한에 와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면서 깨달은 점은 새로운 것은 과감하게 받아들이며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고 좋은 점은 본받으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얻은 배움
2001년 말 부여에 오고 나서 내가 약 3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쓴 돈은 무려 1천만원이다. 정착금을 받아 당시 통장에는 2,100만원 정도의 돈이 들어있었다. 700만원을 집 임대료로 지불하고 남은 돈을 가지고 여행을 준비했다. 그 때는 돈을 아껴서 잘 쓰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생각 없이 쓰는데 바빴다. 비행기, 배, 기차로 제주도에 3번 갔는데, 후에 계산해 보니 그 3번의 여행 경비가 무려 400만원이었다. 또한, 하나원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일주를 하게 되었는데 남해안에서 동해, 서해안까지 아는 사람들을 다 찾아뵈었다. 여행에 대한 뚜렷한 계획 없이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돈을 물 쓰듯이 쓰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을 하다가 3월에 부여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은행에는 100만원도 채 안 되는 돈이 남았었다. 3개월 동안 전체 정착금의 1/3을 다 써버렸던 것이다. 그 때 형사가 “돈은 쓰기 나름이지만 그 돈을 매우 아까웠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말뜻이 오묘하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많은 돈을 썼지만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소한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행기 티켓도 끊어보고 공항에 찾아가는 법, 좌석 확인 하는 법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이런 일은 모두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라서 잘 모르고 서툴러 이상한 시선에 난처하기도 했지만 누구나 처음은 있고 시작은 언제나 서툰 게 아닐까? 이 외에도 전국을 둘러보면서 지역별 말투나 생활문화 등 특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제주도나 경상도 사투리는 다소 강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계속 들으면 친근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고 강원도는 날씨는 추울지 몰라도 사람들은 따뜻하고 단합되어 보였다. 여러 낯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사람들을 대할 때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돈의 가치
여행을 통해 돈을 쓰는 법을 알았다면 여행 후에는 돈의 가치에 대해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행 후에 통장에는 채 100만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이 하시는 아이스크림회사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새벽 4시 30분에 출근해서 저녁6시에 퇴근했는데 한 달 받는 월급이 60만원이었다. 그리고 한 대형 슈퍼마켓에서 박스 정리하는 일을 해서 25만원, pc방 교대 시간 때워주는 아르바이트로 월 15만원 정도 벌었다. 전부 합하면 한 달 버는 수입이 대략 100만원이었고 여기에 정착금 45만원을 합하면 한 달에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145만원이었다. 이 중 100만원은 무조건 입금시켰고 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려고 통장을 학원 원장님에게 맡겨 놓았다. 돈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생활비 45만원 중에 세어보지 않고 대충 한줌을 이불장 밑에 던져 넣어 버렸다. 월세 18만원에 전기비 수도세 등등을 합하면 한 달에 25만원 정도가 나온다. 돈을 아끼려고 전기와 물을 최대한 아껴 썼다. 겨울에도 보일러를 때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춥지 않냐고 물어보면 몸에 열이 많다는 둥 아침에 시원한 공기가 필요하다는 둥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상 돈을 아끼려고 보일러를 때지 않았다. 끼니는 거의 라면으로 때우곤 했는데 아이스크림회사라서 그런지 주변에 간식이 많아 아침은 라면이나 간식으로 때우고 점심은 최대한 배불리 먹고 집에 돌아오기 전에 pc방에서 라면하나로 때우며 하루를 보냈다. 일을 다 마치면 저녁 11시에서 새벽 1시 정도에 들어왔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몸이 많이 상해 병을 얻었고 9월 말 쯤에 병원을 다녔다.
전기세, 수도세 등 생활비는 아끼면 된다는 생각에 그다지 아깝지 않았지만 달 별로 일정하게 나가는 집세는 너무 아까웠다.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버는 돈인데 월 25~30원 나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결심 끝에 동사무소를 찾아가 집세를 줄일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탈북자이고 또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는데 내 기본월급의 반이 집세로 나가는 것이 말이 되냐고 집에서 잠깐 자고 회사로 출근하는 데 그 돈을 다 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얘기했더니 추가임대보증금을 넣을수록 집세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전세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실상 월세가 너무 아까워 집을 내놓고 작은 전셋집에 들어갈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런 기회가 있다고 하니 너무 기뻤다. 나는 월급을 받는 대로 그곳에 넣기 시작해서 현재는 월세가 5만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일을 통해 아끼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돈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찾아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개월 동안 너무 자신을 혹사 시켰더니 병이 나서 아이스크림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건강 악화로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일하는 동안 실망스러운 사건이 터졌는데 그 사건이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하는 중 한번은 컨베이어 벨트에 손이 감겨 들어갔다. 운 좋게도 기계가 멈춰 재빨리 손을 빼냈지만 손등이 퉁퉁 부어올랐고 통증이 심했다. 사장이 병원에 가라면서 “혁아! 너 보험은 있냐?”라고 물어보기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사장은“ 그래 다행이다. 그러면 병원에 가서 어떻게 하다 다쳤냐고 물으면 그냥 놀다가 담에 손이 부딪쳐서 그랬다고 이야기해라. 일하다 다쳤다고 이야기 하면 안 된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사장의 이 말 한마디가 여태껏 보아오던 사장에 대한 생각을 전부 바꿔 버렸다.
함께 일하던 형이 병원에 데려다 주면서 나에게 월급이 얼마냐고 묻길래 60만원이라고 하니 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좀 전 사장이 했던 말을 하니 형이 “혁아, 너와 일한지도 비슷한데 난 창고정리를 하고 월급이 120만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네가 열심히 일하는 만큼의 대가가 너무 적고 오늘 일을 미뤄봐서도 회사를 그만 두는 게 낫겠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형은 사장의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언도 해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장 그만 두는 게 좋은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월급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이 다친 상황에서 그렇게 얘기 했다는데 실망스러웠고 대한민국에서 처음 일한 직장에서 차별을 받았다는 데 가슴이 아팠다.
사장에 대한 환상을 깨고 일을 그만 두었을 때 담당형사가 나에게 “이제 뭐 좀 보이냐?”라고 물어보았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내가 겪은 안 좋은 경험을 모든 일에 결부시켜 비관적으로 보기보다는 이번을 계기로 두 번 다시 이용당하지 않게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힘들었지만 어찌되었든 8개월 동안 1천만원을 모았고 힘들게 모은 만큼 돈을 쉽게 쓸 수도 없었기에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알아가기
슈퍼마켓이나 매점에 물건을 사러 갔을 때 간혹 사람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면 사람들은 내 억양이 충청도 말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중국 조선족이에요? 아니면 고향이 강원도에요?”라고 물어봤다. 나는 그런 질문들을 받을 때면 당황했고 “네 고향이 강원도에요” 혹은 “네, 조선족입니다.”라고 말을 던지고 빨리 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런 일이 잦다 보니 작은 가게보다 10분 정도를 더 걸어서 대형슈퍼마켓으로 물건을 사러갔다. 또 나를 보면 이것저것 물어볼까 두려워서 이다. 대형슈퍼마켓에는 직원들도 많고 손님에게 쉽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대형슈퍼마켓이 편했다. 사람들의 이런 호기심이 부담스러워 말투를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밤, 낮으로 시간만 나면 TV를 틀어 놓고 드라마 등에서 쓰는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해보고 속으로 외우며 다녔다. 또한 정비기능사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대화를 통해 텔레비전에서 배운 말투를 연습해보았다. 모 자동차 서비스 업체에서 정비기능사로 일하면서 손님과의 대화를 통해 북한 사투리를 많이 없앨 수 있었다. 말투를 고치는 데에 노력도 중요하지만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가끔씩 손님이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도 주눅 들지 않고 더욱 더 고치려고 노력했다.
남한에서 적응하는 동안 언어적 문제가 나의 말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한말 속에는 외래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 하면 외래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나의 경우는 영어도 생소했기 때문에 간혹 쓰이는 외래어에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외래어를 쓰는 데 있어 영어를 잘 하기보다는 그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면 외래어를 쓰고 사용함에 있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모르는 외래어가 있으면 친한 사람에게 그 뜻을 물어보았다. 친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편하고 쉽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때로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부분도 꽤 있었지만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물어 보았고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 나갈 수 있었다.
불필요한 자존심,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버려야 할 한 가지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기숙 생활을 하는 1년짜리 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자동차 구조에 대해서 배우는 데 많은 것들이 새롭고 어려웠지만 그 중에서도 공식 같은 것은 특히 더 어려웠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그 친구는 여자였다. 서로 친하고 물어볼 점이 많아서 자주 같이 다니다 보니 주변의 오해를 많이 사곤 했다. 간혹, “서로 좋아하니?”, “그 여자애 남자 친구 있다더라”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 오해들로 인해 가까웠던 친구들이나 동생들과의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그런 오해가 조금은 껄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 여자 친구는 공부를 잘했고 친했기 때문에 자존심이나 다른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배웠다.
자존심 상해 순간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사고를 친 적도 있다. 한번은 친한 동생이 내가 배우고 있는 자리에 와서 그것도 모르냐고 했을 때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애를 주먹으로 때려 이마가 8cm나 찢어졌고 그것 때문에 그 애의 부모님께 사과를 드려야 했다. 그 애의 행동과 말이 내가 어느 정도 자존심을 숙이고 용기 내어 여자 친구에게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건드리고 누그러뜨렸던 내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선생님이 조회시간에 “너희 둘 연애하냐? 왜 맨 날 붙어 다니느냐?”라고 이야기 하여 한바탕 애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 자리로 나는 학교를 나와서 1달 동안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 동안의 소문, 일, 그리고 선생님의 말 등으로 인해 그 여자애와도 거리감이 생겨버렸다. 후에 선생님이 찾아오셨고 나에게 사과를 하셨다. 그 여자 친구와 같이 한번 술 한 잔 하자며 나를 데리러 오셨다. 그렇게 나는 그 여자 친구와 선생님과 셋이서 서로 화해를 하고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선생님에 대한 안 좋았던 기억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여자 친구와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고 그 이후로 더 이상 그 여자 친구와 자주 만나서 공부하거나 이야기 하는 일은 학교 졸업할 때까지 별로 없었다. 후에 내가 정비를 할 때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옛 친구로 돌아가게 되었고 가끔은 서로 술친구도 해주고 아픈 마음 달래주기도 하였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내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정착이란 사람들과 원만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노력해서 사회에서 선의의 경쟁을 겨루는 선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좀 힘들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라온 환경이나 여러 면이 달라 사고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새로운 사회로 와서 새롭고 배울 것이 있다면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서로 갈등이 있으면 상대방에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한 사람들은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려고 돌려서 이야기 하는 경향이 있다. 남한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무엇을 결정할 때 “이것은 이래서 이렇다”고 얘기하기 보다는 “이것은 이래서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이러한 표현법은 나에게 무척 생소했으나 곧 내가 받아들이고 고쳐야 될 점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나에 대한 생각을 과감히 털어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사람이 되기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라는 남한 속담처럼 내게 필요하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구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경험으로 인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학교 기숙사는 인원제한이 있으며 그 제한조건은 학점순위다. 학점이 만점이 4.5라면 평점이 현재 기숙사 여자는 4.3 남자는 3.8이상이다. 물론 남자가 더 높을 때도 있으나 이것은 남자들의 기숙사 경쟁률보다는 여자가 더욱 경쟁률이 심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 학점을 받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이미 나는 탈락자 명단에 있었고 사감선생님을 찾아가 말씀을 드렸고 현재로서는 기숙사를 나가면 나는 학교 다니는 것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정도가 된다고 사정이야기를 했다. 사감선생님의 권한이 어느 정도 좌우하지만 도와주시려는 마음이 있기에 나는 이번 학기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감선생님이 기존에 기숙사 신청한 학생들 중에서 마음이 바뀌어 나갈만한 학생들을 골라 일일이 전화를 하셨고 그중 한명이 나간다고 하여 그 자리에 나를 넣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평소에 나를 많이 아껴주셨기에 사감선생님은 나 모르게 찾아보셨던 것이다. 이런 사감선생님의 배려에 너무 감사했다. 또한 안 된다고 절망하기보다 해결책을 찾아 나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번 기회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절박한 상황을 한탄하기보다 좀 더 적극성을 띄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영어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 나의 영어실력은 보통 대학생에 비해 형편이 없다. 수업시간에도 다른 애들은 쉽게 알고 있는 부분을 물어보기도 곤란해서 겨울방학 동안 계절학기를 듣고 영어 학원을 다니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졸업을 위해 어느 정도의 영어 실력은 필수였기 때문에 계절 학기를 1학점 당 6만 5천원이란 거금을 들어 총 2학점을 들었는데, 워낙 기초가 없다보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 달 동안만이라도 학원에서 기초문법이나 회화를 배워서 수업을 패스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남한 사람들도 10여년 배운 것을 1달 동안 다 하겠다는 게 너무 욕심만 부리는 것 같았다. 학원을 다닌다고 하더라도 여러 달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경제적 여건 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주변의 학원들을 찾아다니며 학원비를 좀 싸게 해줄 수 없는 지 물어보았다. 여기저기 나의 사정을 얘기하다가 정말로 좋은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모 학원 원장님이신데 나의 얘기를 듣고는 “내가 어려서부터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마음 이해된다. 따라서 1월 4일부터 개학이니 다녀라. 조건은 열심히 하는 것이다. 또 학원의 전 과정을 공짜로 다니고 또 개인교사를 한 달 동안 붙여 주겠다. 자네가 학교 졸업할 때까지 공짜로 시켜 줄 테니 자네만 열심히 한다면 나는 상관없다. 개인교사는 월, 수, 금을 하며 개인과외비는 36만원이지만 내가 1달 동안 대겠다. 그래서 기초를 배우고 기본을 배우면 훨씬 낳을 것이고 또 내가 자네 한명을 공짜로 학원을 다니게 한다고 하여 학원이 문을 닫는 일 없으니 너무 부담감 가지지 말라”고 하였다. 원장 선생님이 너무 고마웠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 또 하나의 기회를 잡은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세상에는 아이스크림 회사 사장과 같은 사람들도 많지만 그 반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단지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 도움을 찾아나서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또한 나와 나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 간의 관계가 단순히 경제적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라기보다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표를 향해서 헤쳐 나갈 때 많은 어려움이 다가와도 도움을 주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에게 숙련되고 발전된 나의 모습을 선물하고 싶다. 이것이 그분들이 바라는 것인 동시에 내가 지금 서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힘들 때 전화해서 내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면 마음을 열고 나의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