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회의 탈북자 3인의 증언

 

◆김태진(47·1997년 탈북, 2001년 입국)

북한 현실에 환멸을 느껴1986년 3월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1년반 만에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됐다. 그후 함경남도 요덕군 대덕리 15호 정치범 관리소에서 4년반 동안 수감됐다.
‘요덕수용소’에서는 매주 한 명씩 죽어나갈 정도로 영양실조가 심각했다. 수감자들은 쥐·뱀·개구리를 잡아먹으면서 연명해야 했다.

탈옥하다 체포되면 곧바로 총살됐다. 한 번은 도주했다가 체포된 5~6명이 입에 자갈이 물린 채 3명의 사격수에 의해 총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 수감자들로 하여금 총살된 시체들에 돌을 던지게 하기도 했다.

◆지해남(여·54·1998년 탈북, 2001년 입국)

89년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 이혼한 뒤 피를 팔아 마련한 밑천으로 장사에 나섰다. 그러다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민족과 운명’이란 영화를 통해 배운 남한 노래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렀다는 이유로 국가안전보위부에 체포돼 교화소에 수감됐다. 교화소에서 간수들은 여성 죄수들을 ‘개별 담화’라며 불러내 성추행을 일삼았다.

1995년 석방된 뒤 이웃들은 교화소 출소자라고 하면서 가까이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98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한 뒤 공안에 체포돼 단둥 구류장에 넘겨져 온갖 인권 유린을 당했다. 그후 북송돼 갖은 고생을 하다가 다시 탈출해 한국에 왔다.

◆강혁(17·1998년 탈북, 2002년 입국)

식량난이 가장 극심했던 1990년대 중반 식량 도둑들이 창궐했다. 이 때문에 인민군대가 농장밭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대도 도둑들과 마찬가지로 농장 밭은 물론 개인의 텃밭까지도 터는 바람에 밥 굶기가 일쑤였다.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출석하는 학생 수가 급감했다. 학교에 나오는 애들도 풀만 먹고 살아 온몸에 풀독이 심각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학교에 나와도 한 시간만 때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님들도 먹고 살기 힘들어 농촌으로 떠나 학교도 문을 닫을 정도였다. 1996~97년쯤엔 이 같은 식량난으로 고향에선 매일 아침마다 아사자(餓死者)가 넘쳐났다.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 조선일보 NKchosun.com, 2003-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