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을 떠도는 어느 탈북자의 手記

경향신문 [2004-10-03 18:48]

중국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김군(19)은 1999년 2월 배가 고파 탈북한 이후 지금까지 ‘4번 탈북, 3번 북송’이라는 믿기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다. 김군은 지난달 29일 탈북자들의 캐나다 대사관 집단 진입과 미 의회의 북한인권법안 통과를 보고 흥분과 함께 불안에 떨고 있다.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굴뚝같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다. 더욱이 중국 공안(경찰)의 단속이 강화돼 언제 붙잡힐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수기를 소개한다.

▲1차 탈북 및 송환=나는 함경북도 ○○군(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구체적인 지명은 밝히지 않겠다)에서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당원이지만 1995년부터 불어닥친 ‘고난의 행군(편집자주-식량난을 일컫는 용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인민학교 3학년 때였다. 밤낮으로 양식을 구하느라 분주한 아버지와 배고파 울부짖는 어린 여동생과 남동생,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보면서 차라리 내 입 하나라도 덜자는 심정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99년 2월이었다. 지린성 훈춘으로 건너갔다. 먹을 게 없어 일단 조선족 농가에 의탁해 일을 거들면서 보냈다. 그러나 곧 이웃 주민들의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불안해 5월 중순 옌지로 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탈북자들을 집단 수용해서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마음씨 좋은 조선족 아주머니를 만나 그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2001년 12월, 이웃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중국 공안에게 나를 포함해 10여명의 탈북자 소년들이 모두 잡혔다. 결국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갔다. 첫번째 북송이다. 모두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회령시 구호소(우리의 소년원)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10여일 있다가 도망쳤다. 소년범들이어서 그다지 감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차 탈북 및 송환=구호소를 탈출해 이대로 집에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해 곧바로 두만강을 다시 건넜다. 옌지까지 사흘 밤낮을 꼬박 걸어갔다. 1차 탈북 당시 알았던 조선족 아주머니집을 다시 찾았지만 위험하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랴오닝성 선양으로 갔다. 2002년 1월부터 그곳에서 구걸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잠자리가 없어 하루 10위안(약 150원) 하는 비디오방을 이용했다. 4월 중순, 공안이 비디오방을 불심검문했고 결국 체포됐다. 5월초 북송돼 신의주 보위부에 도착했다. 보위부는 하루 20시간을 콘크리트 바닥에 앉혀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하는 감옥 생활을 강요했다. 피 말리는 생활을 50여일 정도 하다가 신의주 집결소(도 단위의 교양시설)로 넘어가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3차 탈북 및 송환=7월 말 어느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고 감시가 어수선한 틈을 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5일 동안 걸어서 지린성 허룽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베이징에 가서 일자리를 찾는 게 좋을 듯했다. 허룽에서 어느 조선족 식당에 들러 차비를 간신히 빌렸다. 창춘을 거쳐 심야 시외버스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러나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자리도 얻지 못한 채 길에서 잠자며 헤매던 중에 우연히 탈북자들을 재워주는 고마운 분을 만났다. 그는 당분간 자신의 집에 있으라고 제의했고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2003년 2월 초, 집에 있기가 갑갑해 잠깐 집밖에 나왔다가 공안의 불심 검문을 받았다. 신분증도 없고 중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탈북자라는 사실이 금방 탄로났다. 신의주 보위부로 다시 북송됐다. 이번은 세번째 북송으로, 이전보다는 더욱 가혹한 신문이 있었다. 만 18세를 넘은 만큼 이번에는 미성년자가 아니라 성인으로 법률의 심판을 받게 됐다.

2개월쯤 보위부 감옥에서 지내다 그해 5월, 거주지 군으로 다시 가서 정식 재판을 받고 교화 3년형을 선고받았다. 수형 생활을 해야 하는 곳은 회령의 전거리 교화소(교도소)였다. 교화소를 들어가는 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높이 5m의 철 대문에다 초소마다 경비병들이 기관총을 겨누고 있었다.  5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수형자들 가운데 제대로 걷는 사람은 50명도 되지 않았다. 음식이 워낙 부실했기 때문이다. 여자, 남자, 늙은이 할 것 없이 경비병들의 구둣발이나 몽둥이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하루 일정도 새벽 5시 기상에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 노동에다 밤 12시까지 생활총화와 학습을 했다. 100여명이 한방에 자는 초대형 감방에는 이와 벌레들이 득실거렸다.

▲4차 탈북 및 체포, 그리고 탈출=3년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날마다 눈물을 짓던 생활이 계속되던 7월13일. 교화소장이 수형자들을 소집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회 결정에 따라 교화 5년 이하의 수형자는 즉각 방면한다고 선포했다. 교화소에서 7월15일 나온 뒤 순간 엄마 얼굴이 떠올랐지만 청진의 친구집에 들렀다가 8월초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이번에도 베이징에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의 소개로 다른 탈북자들과 만나게 됐다. 2004년 2월10일, 나를 포함해 탈북자 10명이 독일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밤새 잠을 설쳤던 나는 설레는 마음에 약속시간(오전 9시)보다 30분 먼저 독일학교 부근을 돌아다니다 공안의 검문을 받았다. 소지품 검사에서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칼이 나오면서 다시 끌려갔다. 나는 운이 좋아 탈북하기도 잘했지만 운이 없어 중국 공안에 잡히기도 잘 했다.

신의주로 다시 끌려가면 보위부 감옥에서 경을 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던 내게 운이 따랐다. 당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철교 수리 공사를 하느라 통행이 중단된 것이다. 그래서 지린성 투먼 변방구류소로 가게 됐다. 북송을 앞둔 탈북자 34명이 나와 한 방에 있었다. 한 탈북자가 “2003년 8월3일 이후 탈북자들은 전원 교화소가 아니라 한번 들어 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함남 요덕수용소로 간다”고 말해 모두들 불안에 떨었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탈출을 모의했다.

3월28일 일요일. 아침 식사를 배식하기 위해 경비대원이 문을 여는 순간, 탈북자 35명이 우루루 뛰쳐나갔다. 문이 3개나 있었고 경비병들이 10여명 있었지만 이들은 너무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했다. 막상 구류소 밖에 나와보니 탈북자 동료들이 어디로 갔는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걸어서 옌지에 도착했다. 버스나 기차를 타려고 했지만 정거장에는 군인들이 많이 깔려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밤을 이용해 저녁 10시쯤 역 담장을 너머 화물 열차에 올라탔다. 2개월 만에 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알던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독일학교에 들어가려다 나 때문에 그날 거사를 포기했던 동료들은 2월23일 독일학교에 진입하는 데 성공, 무사히 한국에 갔다고 들었다. 이 가운데 1명인 윤모씨(34)는 회령 출신의 북한 사람이 확실하지만 북한 노래인 ‘국기가’를 모른다는 이유로 한국 영사가 탈북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바람에 한국행에 실패했다.(그는 당시 탈북한 지 8년이 돼 가사가 가물가물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지금 다시 시도해보려고 해도 뚜렷한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더구나 혼자서 방법을 찾자니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하지만 나는 맥놓고 있지는 않겠다. 어떻게든 자유를 찾아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하고 싶다. 배우고 싶은 것을 다 배우고 싶다.

〈베이징|홍인표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