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체포, 세 번 脫北한 동포의 手記 – 내가 겪은「인간 도살장」-

이 글은 2004. 9. 월간조선에 실린 수기를 옮긴 것이다.

 

두 번 체포, 세 번 脫北한 동포의 手記
- 내가 겪은「인간 도살장」-

보위부 관리소, 道 집결소, 노동단련대, 수용소 체험

● 보위부 관리소의 한 끼 식사는 옥수수 200알, 염장 배춧국
● 못을 먹거나 칫솔대를 끊어서 먹거나 동맥을 끊어서 자살하는 사람 속출
●「인간 도살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수용소에 한 달 있는 동안 6명이 사망
● 노동단련대에는 뼈에 가죽을 씌워놓은 사람투성이

[편집자 注] 함경북도가 고향인 김선봉(가명)씨가 지난 7월18일 중국에서 만난 月刊朝鮮 기자에게 자신의 수기를 전했다. 북한을 세 번째 탈출해 중국에 숨어 있는 金씨는 수기에 나타나는 북한 지명과 사람 이름을 가급적 가명으로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수기에는 탈출 시기와 장소 등이 구체적으로 명기돼 있으나, 이 부분도 밝히지 않았다.

1999년 중국으로 첫 탈출

북조선에서 「무리 죽음(떼죽음)」이 나기 전까지 나는 직장 생활을 했고, 아이들은 공부를 잘했다.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그런 우리 가족이 나라에서 주던 배급 공급이 끊기면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술 장사, 콩나물 장사, 두부 장사를 해 보았다. 산나물을 뜯어서 팔고 나무를 해다가 장마당에 나가서 팔았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 걱정을 했다. 「위(나라)에서 대책을 세워 주겠지」 하면서 하루하루 지냈으나 생활은 쪼들려만 가고, 더는 가족을 유지할 형편이 못 됐다.

중국으로 탈출한 것은 1999년 3월이었다. 중국으로 넘어오기까지 몇 해를 고심했는지 모른다. 온 가족이 강을 건너와서 ○○市의 산골촌에서 羊(양)을 쳤다. 하루는 옷차림이 단정하고 점잖게 생긴 金선생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찾아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제대로 잘 되어간다』고 했다. 그분의 인도로 우리 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됐다.

우리 아이들은 ○○市에 있는 교회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조선어문, 수학,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 공안의 단속이 심해졌을 때는 7개월 넘게 金선생의 가족과 살면서 보호를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金선생님의 알선으로 우리는 吉林省(길림성)에서 黑龍江省(흑룡강성) ○○市로 옮겼다.

足鎖와 手鎖에 묶여 북한으로

큰 아이들은 「성경 통독반」에, 작은 아이들은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서 반장·부반장을 했고, 우수 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조선족 동네로, 화목한 동네였다. 우리 부부는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2002년에 어떤 사람의 「얼림수」에 말려들어서, 遼寧省(요령성)의 ○○으로 거처를 옮겼다. 도착한 지 2일 만에 식구 중 1명만 빼놓고 전체가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근 한달 가량 잡혀 있다가, 丹東(단동)으로 호송됐다.중국 구류소에서 힘들게 번 350달러와 인민폐 400위안을 모조리 빼앗겼다. 丹東의 중국 변방대에서는 남자고 여자고 실오라기 한 개 걸치게 하지 않고, 돈과 소지품을 빼앗아 갔다. 먼저 보는 병사가 임자였다.

호실은 널마루를 깔았는데 창문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족쇄와 수쇄로 두 사람을 한꺼번에 묶었다. 족쇄와 수쇄를 찬 상태에서 그 다음날 버스에 올라 압록강 다리를 건너 공포의 땅으로 들어섰다. 변방대에서는 국제 관례인지 버스 안에서 수쇄와 족쇄를 풀고, 인원을 점검한 뒤 문건과 함께 북조선 측에 우리를 넘겼다.

알몸으로 공포와 근심만이 기다리는 내 나라 내 땅으로 가게 됐다. 우리는 파철로 용광로에 들어가야 할 버스를 타고 신의주에 있는 보위부 관리소에 도착했다. 보위부 군관 하전사들이 동물원에 구경이나 나온 듯이 우리를 바라보며 남자는 『이 새끼, 저 새끼』, 여자는 『이 간나, 저 간나』로 불렀다. 『줄을 맞추라』, 『머리를 들라』, 『머리를 숙이라』 하면서 희롱했다. 身檢을 한다면서 입은 것을 모조리 벗기고, 돈과 금지품이 있는지 검사했다. 단추와 지퍼 고리까지 펜치로 다 자르고 부쉈다. 보위부 관리소에는 감방이 10개 있었다. 복도에는 보위부 병사들이 보초를 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리고 패는 일이 계속됐다. 소름 끼치는 곳이었다. 널마루를 깐 좁은 감방 안에 위생실(화장실)』이 있었는데, 악취로 정신이 띵할 정도였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남자 감방과 여자 감방이 갈라져 있다. 남자 간수가 통틀어 관리하는데, 여자들이 『선생님, ×호 감방 ××× 소변(대변) 볼 수 있습니까』하고 허가를 구했다. 앞에 가린 것이 없다 보니, 위생실에 앉은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부끄러울 뿐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먹는 것은 덜 익은 강냉이에 콩을 조금 섞어 푹 삶은 것이다. 한 줌 정도인데 알 수를 세어 보니 200알 정도였다. 국은 염장 배추를 맹물에 삶은 것이다. 다른 나라 개나 돼지는 맛이 없다고 안 먹을 음식이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줄을 맞추어 「올방자(책상다리)」로 틀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중노동이었다. 다리가 아파서 몸을 약간 움직였다가는, 부잣집 아이가 이밥 먹듯이 매를 맞았다. 보위부 관리소에서 한 달 가량 있는 동안 밖에 나와서 햇빛을 쪼인 것은 딱 세 번이었다. 초겨울인데 바지만 입히고 웃옷은 다 벗겨 맨살을 드러내야 했고, 맨발이었다. 소름끼치는 일은 우리를 취급하는 지도원의 악독함이었다.

처음에는 이름, 나이, 거주지, 직장 직위를 확인했다. 종이를 5~6장 정도 주고, 앞뒤면에 꽉 박아 쓰라고 했다. 자신의 경력·가족·친척 관계를 쓴 다음, 중국으로 넘어가게 된 동기, 가족회의 내용, 언제 몇 시에 식구 몇이 집을 떠났으며, 강을 어디에서 어느 날 몇 시경에 넘어, 어느 마을 누구네 집에 언제 도착하여 무슨 일을 하고, 다른 곳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쓰라는 것이었다.

식구가 많을수록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다. 제가 불려 나가면 다른 식구들이 가슴을 조이고 다른 식구가 불려 나가면 그 나머지 사람들이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보위부에 잘못 걸리면 죽어서도 못 나온다는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고, 부모·형제·친척들이 피해를 입는 게 북한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보위부에서는 한국 사람을 만나 보았는가, 한국 출판물이나 방송을 들었는가, 종교 교육을 받았는가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우리 가족은 다 걸리는 판이니 속이 타서 재가 될 정도였다.

지도원이 조사하려고 부를 때마다 속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지도원들은 우리가 죽을 결심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런 일은 없었겠지」, 「저런 일은 없었겠지」하는 식으로 물어봤다. 보위부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 못을 가져와 먹는 사람, 칫솔대를 끊어서 먹는 사람, 팔목에 있는 동맥을 끊어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혀를 끊어서 죽자고 하는 사람….

이렇게 다양하게 죽는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그곳의 실태다. 한 달 가량 있다가 보위부에서 「여기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아무데 가서나, 누구한테나 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손도장을 찍게 했다. 보위부 관리소에서 나와 뼈에 가죽을 씌운 사람들, 온전히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서 道 집결소로 갔다. 거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가죽을 쓴 사람 흉내를 내는 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오전에 도착했더니 통강냉이 삶은 것을 조금 먹이고, 오후에 「당가(들것)」를 들고 돌 운반하는 일을 시켰다. 우리 아이가 막돌을 들고 힘들게 가는 것을 보고 아내가 『좀 적게 들고 자주 다니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춘남이라는 지도원이 처벌로 아내가 든 당가에 모래를 더 담게 했다. 몇 발짝 가다가 쓰러지고, 몇 발짝 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껌을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道 집결소는 강한 노동을 통하여, 그리고 규율 생활을 통하여, 배고픔을 통하여, 죽는 연습을 시키는 곳이었다. 신의주를 떠나 4일 만에 ○○에 겨우 도착했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 중국으로 도망쳤나」 하고 구경 나온 사람이 있고, 『저것들을 왜 죽이지 않고 데리고 왔느냐』고 욕지거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살던 곳에 다시 돌아오니 숨이 멈췄다.

아내와 아이들은 며칠 동안 분주소에 갇혀 조사를 받고, 비판서를 쓰고 풀려났다. 나는 軍 노동단련대에서 고역을 치르던 도중 화목장에 올라간 기회에 도망을 쳤다. 숨어 있으면서 부모·형제분들과 친척·친우분들을 만나 하나님에 대한 간증을 했다. 「내가 다시 북한으로 끌려온 데는 아버지의 뜻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해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우리 아이 하나가 중국 ○○市의 교회에서 피아노와 컴퓨터, 찬송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조선족이 중국 공안들을 달고 와서 『이 아이가 북조선 아이』라고 고발을 했다.

30리를 왕복하면서 비료를 운반

우리 가족은 2003년 중국의 圖們(도문)을 거쳐 南陽(남양)에서 ○○으로 끌려갔다. ○○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남자, 여자 모두 합하여 200명 가량이 잡혀 있었다. 감방은 3개이고, 그 감방들 주변에는 3면이 복도로 되었다. 감방의 방 하나는 9m2쯤 된다. 여기에 최고 47명까지 들어가 사람 위에 사람이 있게 된다. 먹는 것은 100명당 국수 2kg을 염장 배춧국에 섞어 주는데, 네 숟가락 정도 뜨고 나면 바닥이 드러난다.

○○市 보위부에는 13일 동안 있었다. 보위부에서 나와서 그 다음에 간 곳이 ○○市 노동단련대이다.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갇혀 있다. 첫째가 몇 달간 벌을 받는 사람들이고, 둘째가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이고, 셋째는 청진으로 이관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먹는 것은 한 끼에 40g 정도를 준다. 중국 돈을 잘 감추고 온 사람들은 조선 돈으로 바꾸어서 빵을 사 먹기도 한다. 『중국 돈 300위안 정도면 빼주겠다』는 소리에 귀구멍이 커져서 돈만 떼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한 일은 마을의 퇴비장에서 퇴비를 한 당가씩 들고, 줄을 맞추어 산으로 가서 나무에 뿌리는 것이었다. 오전에 30리, 오후에 30리 정도 걸어야 한다. 줄을 맞추지 않거나 뒤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두엄을 든 상태에서 왔다갔다 반복동작을 시킨다. 너무 고달파서 남자고 여자고 울면서 일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病者(병자)들은 단련대 내부에서 일을 시킨다. 두엄을 나르는 사람들보다는 편하지만 사람 취급을 못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루는 온 겨울철 동안 쌓인 인분을 밭에 널어 놓는 작업을 했다. 인분 속에 얼음덩이가 있었다. 한 지도원이 인분 속에 있는 얼음덩이를 꺼내라고 지시를 주었는데, 선뜻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지도원은 50명 가량 되는 인원을 인분을 뿌려 놓은 밭 위에서 「모여, 헤쳐」를 여러 번 시켰다. 사람들의 신발과 바지 밑은 인분투성이였다. 히죽히죽 웃는 지도원의 얼굴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었다.

인간 도살장 수용소

한 달 만에 ○○수용소에 이감됐다. 그곳은 인간 생지옥이었다. 수용소는 「인간 도살장」이라는 별명을 단 지가 오래다. 우리가 있는 한 달 동안에 능히 살 수 있는 6명이 죽어 나갔다. 감기에 걸린 것을 치료해 주지 않아 폐렴과 늑막염에 걸려 죽어 나가고, 설사를 만나 죽어 나가고, 먹지 못해 허약에 걸려서 죽어 나가고, 군사 복무를 마친 스물아홉 살 젊은이가 아침에 시체로 변했다.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수용소 앞에 산이 하나 있다. 수용소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의 공동묘지이다. 여름에 죽은 사람들은 땅을 어느 정도 파고 묻어서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겨울철에 죽은 사람들은 땅을 대충 파고 묻어 여름 장마철에 개들이 사람의 팔, 다리를 물고 다닌다. 수용소에서는 자기가 살던 곳의 보안원이 데리러 와야 그곳을 떠나게 된다. 수용소 정문을 뛰다시피 벗어나서, 나는 나를 데리러 온 호송 보안원한테 사정하고 다리쉼을 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중국에서 잡혀온 것이 두 번째이기에 단련대에서 6개월 징역 생활을 시키라는 문건이 내려왔다. 두 번째 단련대 생활은 첫 번째와 비슷하게 힘이 들었다. 단련대에 들어온 사람 중엔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도문을 걸쳐 여러 곳을 「졸업」하고 오는 졸업생들이다. 몸은 뼈에 가죽을 씌워 놓은 상태이고, 술에 만취된 사람들처럼 걷는다. 사람의 몸에서 먼저 맥이 빠지는 곳은 다리 부분이다. 그 다음에는 팔에 맥이 빠지고, 그 후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누웠다가 일어날 때 정신이 깜빡깜빡한다. 땅과 하늘이 맞붙어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노동단련대에도 오락회가 있다

아바이(아저씨) 한 분은 걸음이 잘 되지 않아 늦게 왔다고 매를 맞았다. 이쪽 얼굴을 치면 저쪽으로 넘어지고 저쪽 얼굴을 치면 이쪽으로 넘어졌다. 악에 받친 아바이가 곡괭이로 지도원을 찍으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말렸다. 그곳에서는 오전 4시50분에 기상시켜 오전 5시부터 작업을 시켰다. 곡괭이로 나무 뿌리를 캐서 새 땅을 일구는 작업이었다. 작업을 오전 8시경까지 하는데 작업에 시작하여서는 잠시의 휴식도 없다. 아침밥은 상무가 『작업을 중지하고 내려오라』고 하여야 산에서 내려와 먹는다. 상무가 늦잠을 자거나 기분이 나쁘면 오전 9시에 먹는 것이 보통이다. 아침에 200g 정도 되는 감자 삶은 것을 껍질째로 주는데 그것을 먹고 소변을 보게 하고 인츰(곧) 작업장에 올려 보낸다.

점심은 낮 12시에서 오후 1시경에 먹고, 저녁은 날이 어두워져야 내려와서 먹는다. 보통 오후 7시30분이나 8시경에 먹게 된다.  노동은 8시간 안에 바깥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것의 1.5배 정도 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으나, 단련생들은 하루에 적어도 13시간 이상, 보통 노동자의 두 배 이상의 일을 하여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감자 몇 알에 산나물국을 먹는다. 산나물로 배를 채우는데 영양가가 얼마 없어서인지 인츰 허기가 진다. 살이 여위어 가는 게 스스로 느껴진다. 단련대에서는 일이 끝나도 편히 쉬게 하지 않는다. 밤 10시에 잠을 재우는데 그때까지 바깥에 앉혀 놓고 오락회를 하라고 한다. 일에 지치고, 배가 고프고, 규율 생활에 들볶여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생에 무슨 흥이 나서 노래와 춤이 나오겠나. 오락회를 잘하지 않으면 온 밤 재우지 않다 보니 억지다짐이라도 하는 흉내를 내야 한다.

『허약 상태에서 일을 견뎌내기 힘들다』, 『병이 있어 힘들다』고 상무나 대장한테 얘기를 해도 욕을 먹지 않으면 불이익이 돌아오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누가 도강하라고 했는가』, 『누가 여기에 들어오라고 했는가』 식으로 욕을 하거나, 『정신이 덜 들어서 그런다』면서 어렵고 힘든 일에 배치시켜 뼛속까지 고통을 준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안면이 있거나, 잘사는 사람들은 상무나 대장에게서 외출을 얻어서 나갔다가 들어오기도 한다. 들어올 때에는 돈이나 술·담배 같은 것과 음식 같은 것을 거나하게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들에게 갖다 먹인다. 먹고 나면 말투가 달라지고, 헐한 일을 골라서 시키고 곱게 본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단련대에 있는 직원들은 생활이 피고, 가정생활도 맛이 나게 된다.

그런 재주도 없는 사람들은 『먼저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편하겠나』라며, 누가 건드리는 사람 없이 가만히 누웠다가 죽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다. 단련대에서는 죽어도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허약이나 병으로 하여 죽음은 며칠이나 몇 시간 앞두고 병보석으로 내보내게 되는데, 자기 혼자 걷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업히거나 당가에 들려서야 단련대에서 나오게 된다. 나와서 절반 이상이 죽게 되는 것은 공식이다. 나도 병보석으로 다 죽게 되어 나와서 120리나 되는 길을 3일간이나 겨우 걸어갔다. 오는 도중에 입은 옷을 팔면서, 그리고 빌어먹으면서, 또한 귀인들을 만나기도하면서 老부모님과 형제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세 번째로 북한 탈출

열흘간 어느 정도 영양을 보충한 다음 미성년이기에 이미 풀려 나와 있는 막내를 데리고 원한의 땅을 다시 떠났다. 아이의 부축을 받아 가면서 강을 건넜다. 중국은 새 희망이 있지만, 자주 잡아가기에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고 있는 金선생의 도움으로 ○○市에 무사히 정착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땅에는 평화가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고 있다. 지금 나와 막내는 金선생님과 가족들이 주는 여러 가지 보약들과 음식으로 몸을 추스리고 있다. 지금은 하루하루 건강이 회복되어 가고 있다.

○○市에 숨어 다니고 있는 아이를 통하여 내 아내와 다른 가족들이 단련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경에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지 않는다」고 하셨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져서 온 가족이 한집에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가정 예배 드릴 수 있는 날이 꼭 오리라 믿는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루 빨리 북한을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복이 내려지는 제2의 예루살렘이 되게 해주시길 기도한다. 여러분들이 저와 우리 가족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 주기를 기원한다.

여기에 쓴 것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