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북한 감옥 생활 -4- -이민복

내가 겪은 북한 감옥 생활 -4-

이민복
(전 북한 과학원 농업연구원)

북한감옥에서 희망과 생명의 빛

한번 갇히면 다시는 놓여 나오기 힘들다는 정치보위부 감옥에서 내가 살아나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천명이다.
천명에도 근거는 있다. 내가 석방될 수 있었던 근거는 우선 국경을 넘자마자 중국에서 하루천하로 체포된 것이 화가 복이 되었다.
왜냐면 중국에서 여러 날 체류하다 체포되었다면 그동안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하는 의심이 많아지나 하루만에 잡혔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으로 왜 월경했는가에 대한 집요한 심문에는 시종일관 『나는 농업과학자로서 식량문제를 해결한 중국의 농업기술을 관찰하고 싶었다』는 과학자의 순수한 행동으로 이해하도록 죽을지언정 강변하였다. 과학자의 변태적 집착성을 그럴수도 있다고 믿도록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지난 기간 과학연구밖에 몰랐던 나의 전적이 이를 뒤받침하리라 믿었다. 실제로 국가보위부의 수사로 나의 경력조사 특히 가택수색과 수십권의 일기장 검열을 통해 충실하였던 지난 나의 경력을 통해 오히려 과잉충성분자로 확인할 정도로 되었던 것같다.


한편 내가 맡아 연구하던 강냉이 깜부기 내병성 육종사업은 공화국적으로 나 외에 누구도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도 석방요인의 하나로 꼽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 제일주의 북한에서 또 악명 높은 국가정치보위부가 위의 사실만으로 월경자를 순순히 내놓기는 만무한 것이다.
따라서 사상 유례없는 북한정치하의 감옥 속에서 생명의 희망이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희망의 빛이 있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외부세계에서 벌이는 북한인권개선운동의 여파였다.
정치보위부 집결소의 당비서가 예심원들에게 하는 말을 심문받던 중이던 내가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1990년) 유엔을 비롯한 국제인권단체들이 평양방송을 비롯한 국내외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분위기 속에서 김부자는 정치범이 단 한명도 없다고 공언하면서 내적으로는 『너무 많이 잡아들여 적을 많이 만들지 말며, 또 감옥이 차고 넘쳐 국제적인 인권운동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될 수 있으면 당과 근로단체조직들에서 맡아 교양·개조시키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당과 근로단체조직이라면 감옥과 같은 독재기관이 아닌 노동당과 사회단체조직 즉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현 김일성 청년동맹), 소년단, 직맹, 농근맹, 녀맹 조직들이다. 세계인권단체들의 북한인권개선운동이 시끄러워서라도 무시하지 못하였던 김부자의 내적지시로하여 월경죄 3년 징역, 또는 적어도 6개월간 집결소 감옥에 있어야 했던 나는 3개월만에 석방되었으며 기타 수인들도 많이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지난 기간 월남자는 그의 가족까지도 무작정 처벌하던 법도 현재는 조건적으로 적지않게 완화하였다. 월남자의 아내가 남편과 공모하지 않은 경우, 이혼을 선포하면 본인 처벌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 성도 「반동」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어머니 성으로 바꾸어 아버지와 상관없게 법적장치도 만들어 놓았다.
세계적인 인권운동의 여파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80년대 초반부터 북한당국의 태도변화를 유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치에 의하면 간수들이 수인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으며 구타하는 경우가 검찰에 의하여 발견되었을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 상부의 지시가 이러하니 간수들은 무지한 수인구타를 완화하고 때리는 경우도 근거(상처)가 남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이런 제약 속에서 간수들은 새로운 형태로 즉 수인을 시켜 수인을 때리게 하는 방법을 적용하였다. 내가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정치보위부 집결소에서 나를 정치범은 아니라는 판단하에 안전부 집결소에 넘겼을 당시 고참 수인이 새로 온 수인을 집단폭행하여 혜산 전문학교의 한 학생 수인은 고막이 터져 며칠 후에는 고름이 흘러 나왔고, 다른 수인들도 뼈가 부러지고 상처가 나 썩어지다 못해 죽어나가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 실례가 양강도 백암군에서 혜산시 건설에 동원된 돌격대(작업대) 소대장이었던 김재철(당시 32세, 가정 있음)의 타살 사실이다. 문제는 사망시킨 원인 왜곡이며 이러한 사실을 사실대로 사회에서나 법적으로 제약할 수 없는데 있다. 김재철의 죽은 원인은 분명 타살인데도 집결소 안전원(간수)들은 부검의사까지 데려와서 타살이 아니라 심장마비로 부검 증명서를 만들어 상부와 가족에게 거짓 통보하는 것이다.
한편, 사망 원인을 똑바로 알고 있는 감방내의 수인들 앞에 와서 안전원은 엄포를 놓기를 『헛소리를 했다가는 가만놔두지 않겠다』고 압력을 놓고 간다.
이 사실을 누군가 폭로했다면, 부검 증명서까지 갖추고 있는 안전원들에게 오히려 꺼꾸로 당하게 되며, 또 어디다 호소할 사회분위기가 갖춰진 북한이 아니다. 나 역시 이러한 사실을 남한에 와서야 공개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어야 한다.

혜산의 정치보위부 집결소(예심소)에서 경제범(주로 월경 밀수꾼)으로 판단되면 수감 10<1/4>~<1/4>20일 후에는 사회안전부 집결소로 넘기며 정치범 혐의자는 적어도 3개월, 보통 6개월 이상 수감하였다가 정치범으로 판단되면 정치범 수용소인 「관리소」에 넘겨 몇년간 혁명화 후 석방 또는 종신 수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별히 집결소 생활(예심기간)의 한달은 일반수용소 생활의 10년 맞잡이라고 할 정도로 심리적 압박과 정좌와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린다. 내가 갇혔던 집결소 감옥생활기간(1990년 11월~1991년 2월)에 하루 평균 2명 정도 붙잡혀 들어 왔다.
수감된 월경자 중에는 밀수꾼이 많았고 또 정치적 월경자도 적지 않았다. 그 중 기억나는 정치범들을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 아버지가 정무원 고급간부라는 20대 청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경유 홍콩에 이르렀으나 그만 중국당국에 체포되어 북한에 이송됐다. 내가 심문당할 때 곁에서 그 청년이 심문당하고 있어 알게 되었다.
조사관(예심원)은 『이 놈의 새끼 아버지는 고급간부인데 이 자식은 남조선으로 달아나려 홍콩까지 갔던 놈』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홍콩 근처까지 갔다 잡혀온 그 청년은 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조건에서 이제는 정치범으로 죽겠구나 하는 낙심의 얼굴이 곁에서 보아주지 못할 정도로 처량하였다.

② 혜산에 살고 있던 40대 사람
쏘련 벌목공으로 갔다 와서 세상물정도 좀 알던차 중국으로 탈북하여 몇년간 살다가 체포돼 왔다. 이 중년은 모든 것을 체념한듯 간수와도 말싸움할 정도였다. 한번은 간수와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이때 그는 『북한이 중국보다 좋으면은 왜 탈출했겠느냐, 또 왜 이렇게 붙잡고 못가게 하겠느냐』고 하였다. 말문이 막힌 간수는 주위 수감자들에게 영향 미치는 것이 좋지 않아 급기야 떠들지 못하게 하려고 그 추운 겨울인데도 찬물을 그에게 끼언져 부었다.
혜산 토배기 출신이었는지, 장기수여서인지 집결소 근처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음식차입도 유일하게 받아 먹군 하였다. 음식차입은 규정에 없는 일이지만 집결소 간수들에게 뇌물을 주면 허용되기도 하였다.

③ 인민군 중사
군부대에서 탈출하여 전국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압록강 얼음판을 넘었으나 뭣때문인지 되돌아오다가 국경경비대에 체포되었다. 부모님의 집은 혜산과 가까운 운흥군이라고 기억된다. 감방 첫날 기운차 보였던 그는 그 다음날 벌써 풀이 죽어 버렸다.

④ 평양출신 20대 초반 청년
평양에서 살던 가족이 백두산 두메산골 백암군 지역으로 추방됨. 월경시도하다 체포·수감됐다. 어린 가슴에 너무나 괴로워 얼굴이 파리해서 허공만 쳐다보군하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 기억에 남는다. 감옥내 밀정 임무받고 나에게 접근해온 적이 있다.

⑤ 동감방 227번
황해도 신계 출신으로서 남한 삐라를 보고 수천리를 걸어서 중국 국경을 넘었으나 북한 옷차림을 수상하게 여긴 중국 경찰이 체포해 북한으로 이송됨. 경제범으로 이전에 감옥생활 전적이 있었으며, 집결소 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관리소(정치범 수용소)에 빨리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단식, 자살기도도 있었다. 밀고하는 습성이 농후하여 밀정짓도 서슴치 않았다. 소금을 빨면 달다고 한 수인이다.

⑥ 동감방 ×××번
고급 당간부 자제이다. 중국으로 탈출하여 넉달동안 체류하다 통화의 열차 안에서 단속 체포됨. 부모님이 과학자였다고 속이면서 나에게 접근하였던 감옥내 밀정이었다. 음식과 담배를 주면서 밀정짓을 하라면 누구나 다 응할 상태의 오직 본능만 남은 굶주림과 무조건 복종의 감옥 분위기이다.

이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범 또는 경제범으로 어제도 오늘도 고통받고 있다. 탈북자 가족은 출가한 형제나 이혼한 처자식을 내놓고 직계가족(부모 포함)은 종적없이 추방지로 보낸다. 주요 인물인 경우에는 형제나 처자식까지도 철직·추방·체포·구금도 한다.
그러나 예외인 경우도 있다.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황장엽 비서의 경우 세계여론을 의식해서 그의 부인과 가족 심지어 중국으로 탈출하려다 체포된 아들도 감시 속에서 평양 본집에 있다고 한다. 중국 당국도 국제법과 세계적 여론을 의식해서 황장엽 비서의 망명을 인정하였고 남한행 길도 허용하였다. 중요 인물의 망명이라는 이슈 속에서 망명인의 인권보장에 대해 더 논의할 여지없는 세계적 마당인 것이다.
이 사실을 놓고 우리는 수천명에 헤아리는 탈북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북한에서 인권유린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옳은 인권옹호 당위성을 황비서 망명만큼의 세계적 여론으로 끌어 올려놓고 나갈때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확신한다.

인권옹호를 위한 민주적 체계와 언론의 자유가 없는 북한을 제약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세계적인 인권운동하에 조국 남한에서 북한인권을 적극 거론하는 운동을 벌려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 움직임이 1996년 5월에 발족한 「북한 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회」가 있다.
최근 신한국당의 한 의원은 2만여명의 미송환 국군 포로 문제를 국회와 남북대화에 상정하겠다고 하였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남북교류와 통일도 바랄 수 없다고 본다.
북한 사회와 감옥 생활의 체험자로서 한 사람인 나는 누구보다도 이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며 이글을 마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