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북한 감옥 생활 -3- – 이민복

내가 겪은 북한 감옥 생활 -3-

이민복
(전 북한 과학원 농업연구원)

 

북한감옥과 남한 감옥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부족 특징은 손, 발톱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이다. 머리카락과 수염 역시 잘 돋아나지 않는다. 또한 나의 경우만 그러했는지 몰라도 성욕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하였다. 물론 석방 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감옥 안에서는 느낀 바가 전혀 없은 데 훗날에도 나 자신이 놀랐다.
이것을 실험이나 하듯 한번은 여자가 유일하게 붙잡혀 들어와 옆 감방에 있었지만 역시 그러하였다. (물론 처자에 대한 일반 걱정은 하였다.) 성욕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감옥 분위기와 굶주림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를 철거하면서 그 내부를 공개하는 사진책을 보니 감방벽들에는 야한 자태를 한 여자들 사진을 사방에 붙여 놓은 것을 보고 상대적으로 느낀 바가 컸다.
또 감옥 쓰레기장에 쌓여 있는 라면 박스를 비롯한 차입한 음식 포장지들을 보면서 남한 감옥 안에서의 굶주림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가늠해 보기도 하였다. 남한에서 민주화를 위해 자주 감옥에 갇혔던 어느 유명 인사의 감옥수기를 보면 감옥밥이 먹기 싫어 외부에서 들어 온 쵸콜레트를 자주 먹어 뚱뚱해져서 혼이 났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또 시간이 없어 못했던 영어습득을 감옥 안에서 해 냈다고 하니 그 자유함에 더욱 놀랐다.


김일성을 위해 한생을 바쳐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보더라도 환갑이 지나도록 감옥 내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남한 감옥의 실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의 꽃'으로 북한이 대환영하여 판문점을 통해 보낸 임수경 학생의 경우도 일단 실정법으로 몇 년간 투옥은 됐지만 감옥 안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있었다. 석방 후에는 그대로 인기가 더욱 높아져 현재에는 기자 출신의 훌륭한 남자와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또 임수경 본인에 한하여 법적 처벌이지 가족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면 북한의 정치범들은 어떠한가.

정치범은 가장 참담한 수인

북한에서 가장 참담한 수인은 정치범이다. 정치범인 당사자 뿐 아니라 일가친척에게까지 처벌을 받는다. 정치범의 견지에서 경제범을 볼 때에는 경제범이 하늘처럽 보여진다. 왜냐하면 경제범은 아무리 형량이 많다고 해도 언제까지라고 정해져 있고 또 살아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믄이다. 그만큼 정치범으로 규정되면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회생하기 힘들게 만든 것이 북한 정치이다. 직위가 높든지 낮든지 간에 김일성 부자의 권위를 훼손 시켰다고 비친 사람은 용서 없이 처단된다.


필자가 함경북도 화성군(옛 명간, 명천군)에 3년간 현지 사업을 위해 주재하고 있을 때 였다. 장가 갈 나이의 총각 연구사로서 혼사말이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처녀는 어랑촌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혁명화 구역(정치범과 그 가족들을 수용한 구역)의 교사였다. 그 처녀의 말에 의하면 1977년 경에 숙청된 류장식(중앙당 대남담당비서로서 김일성, 김정일의 총애를 받던 간부)과 가족이 그 곳에 있었다고 한다.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류장식은 달구지를 몰고 다니는 산골 농민이 되엇고, 그후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고 한다.


이곳에 수용된 정치범 가족 자녀들은 강제노동을 시키는 데 지장 없을 정도의 글자와 수자를 배울 수 있는 인민학교(초등학교 4학년까지) 교육만 시킨다고 하였다. 한편 1974년에 숙청된 공화국 부주석 김동규(김일성과 라이벌로 항일유격투쟁을 함)도 가족과 이별된 채 단독으로 TV까지 갖춰진 농촌문화주택에서 새끼를 꼬며 있었다고 한다. 자유로 나갈 수 없는 감시 속에서 그래도 공짜 밥은 안 먹는다는 애국충정으로 새끼 꼬는 노동을 하였지만 그 역시 다시 어디로 끌려갔는지종적을 모른다고 한다.
1984년 초여름 내가 현지 연구 차로 기숙하던 화성군 룡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