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북한 감옥 생활 -1- -이민복

내가 겪은 북한 감옥 생활 -1-

이민복
(전 북한 과학원 농업연구원)

머리말

『당신은 남한에 와서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남조선 감옥과 남조선 쓰레기장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대답하는 귀순자는 처음이라 하면서 질문자들은 다시 묻기를 『왜 감옥과 쓰레기장을 먼저 가 보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서슴없이 『어떤 나라에 가든지 그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상태,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그대로 알려면 감옥과 쓰레기장 이상 좋은 견문 장소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나의 견해라기 보다는 사실이 그랬으며, 한편 북한사회와 비교해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법 없이 살 고지식분자로 평을 받던 내가 내 인생행로에 탈북망명자가 되고 또 감옥생활까지 해보리라고는, 그것도 탈북의 길에서 세나라의 감옥(북한, 중국, 러시아)에 갇혀 볼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남한에 와서 조사 받는 수개월의 「무자유한」기간 까지도 감옥으로 포함시킨다면 도합 네 나라의 감옥에 갇혀 보는 것으로 된다. 한편 이러한 체험은 나라 마다의 감옥 실태를 비교해 볼수 있는 객관적 처지에 나를 세워 놓기도 하였다.

탈북동기

북한에 있을때 나는 수령과 국가를 위해 충실하였다.
항일투쟁을 한 인민의 수령이라는 것 하나 만으로도 김부자는 나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했고, 여기에 고지식한 성품과 또 조국과 인민을 위해 무언가 남기고 죽는다는 생의 좌우명까지 겹쳐 있었다. 따라서 『쌀은 곧 공산주의이다』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받들어 전자공학이라는 꿈을 버리고 농업연구로 인생방향을 바꾸기까지 한 정도였다. 나는 오직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일념으로 일 밖에 몰랐다. 술, 담배는 물론 그 흔한 주패(카드놀이)와 장기 놀음도 할 줄 몰랐다.

혁명의 요구대로 서른살 늦장가 가서 첫날밤에 녀자를 어찌 할 줄 모를 정도로 농업연구에만 전념한 것이다. 마침내 내가 맡은 연구분야에서 공화국 제일의 권위자가 되였고 그 처럼 바라던 농업생산기술도 완성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훌륭한 연구성과들이 집단농장 현실에 나가서는 이렇타 할 성과를 못 거두는 것이다.
농장 현실 속에 6년간 직접 나가 체험하여 보니 농업실패의 근본원인은 기술이 잘못되였다기보다는 뜻밖에도 농업정책의 잘못(구조적문제)에 있었던 것이다.
근로자 개개인의 생산의욕을 마비시키는 공산주의적 집단농업방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실례로 잘 알 수 있다. 즉 집단농장 밭에 비해 개인화된 밭에서 나는 알곡생산량은 2~3배 높았다.
따라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대책은 농민이 농사의 참다운 주인이 되도록 현 집단농장을 개인농화 하는 것이였다. 이러한 사실자료와 념원을 담아 「어버이 수령님」으로 믿고 있는 김부자 앞으로 제1호 편지(제의서)를 보냈다. 말 한마디 글 한자 잘못으로 죽고 사는 북한사회에서 이 제의는 대단한 모험이였다.

위험천만한 정치적 제기라고 만류하다 못해 처는 이혼에 이를 정도였다. 개인농 주장은 이색사상으로서 북한사회에서 허용이 안된다. 권력유지를 위한 김부자의 정치본성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나는 어버이 수령님으로 믿었던 김부자에 대한 우상화는 와그르 무너지게 되였다. 식량문제 해결에 삶의 뜻을 두었던 나는 북한사회에서 살 의미를 잃어 버렸다.
김부자 앞으로 편지 쓰기 전 까지는 꿈에서 조차 생각 못하였던 망명과 월남의 뜻을 불현듯 가지게 되였다. 자체분석과 중국교포들을 통해 남조선이 결코 북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독재적이고 헐벗고 굶주린 사회가 아니라는 것도 어느 정도 알게 되였다.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남한에 가서 『북한의 식량난은 개인농을 하면 해결 된다』라고 소리높이 외치고 싶었다.

중국에서 잡혀 오다

탈북을 결심할 때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조국반역자」가 된다는 죄책감이다. 조국반역자 걱정부터 하는 북한사람들은 그만큼 정치교양에 세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갈등은 이남도 내조국 땅으로서 내조국에 찾아 가는 것이 조국반역자로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해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금시 깨닫게 되는 것을 지금껏 수십년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살았다는 것이 참 이상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무섭고 두려운 것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가족친지에 대한 걱정이다. 이렇게 살바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각오는 가졌으나 가족이 문제였다.
가족연대처벌은 북한당국이 쓰는 가장 악랄한 억압방법이며, 중세기적 인권유린 행위이다. 그러나 이혼함으로 처자식은 무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기타 친지들에게도 억압을 적게 하기 위해 소리없이 사라지는 방법으로 탈출을 실행하였다. 국내에서 부터 탈출하는 실정에서 가장 어려운 사선은 국경이다. 북남군사분계선은 너무 막연한 장벽이여서 조·중 국경인 압록강을 넘어 간 것이다.
조·중국경은 최근 탈북자의 증가로 북당국이 가장 경계하여 무력을 수배나 증강한 삼엄한 상태이다. 간난신고 끝에 국경을 돌파한 나는 이제는 살았구나 했는데, 뜻밖에도 날카로운 북경비대가 아닌 중국경방대(국경경비대)에 붙잡혔다.

그만큼 나는 중국땅에서 방심했던 것이다. 난생처음 찬 수갑은 중국제이고 중국감옥에 먼저 갇히게 되였다. 중국과 북한은 공산국가로서 국제난민법을 무시하고 탈북자들을 잡으면 북한에 압송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나는 중국 장백현 장백시가에서 체포·감금되였다가 압록강의 친선다리를 거쳐 양강도 혜산으로 넘겨졌다. 북한 국경초소에 이르니 총을 든 군인은 나를 보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로 『꿇어 앉아!』라고 소리쳐 땅바닥에 그대로 꿇어 앉게 하였다. 간단한 인계인수처리가 되자 권총으로 무장한 호송 정치보위부원이 나의 손목에서 중국제 수갑대신 보다 많이 사용한듯 보이는 도금이 벗겨진 북한제 수갑을 채우고 감옥으로 후송하였다.

집결소 생활

월경자는 일단 정치적 색채가 띄므로 정치보위부(현 국가보위부)가 취급한다. 월경자를 일차적으로 가두는 감옥은 정치보위부 집결소라고 부르며 양강도에는 도청 소재지인 혜산에 있었다. 집결소는 예심소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며, 그 사명은 월경자 중 정치범과 경제범(밀수꾼)을 확인 분류하여 정치범은 관리소(정치범 수용소)에, 경제범은 교화소에 보내는 곳이다. 북한 감옥(집결소)에서 처음 당하는 수모는 제손으로 죽지 못하게 한다는 조치로서 혁대, 지퍼, 단추, 심지어 빤쯔의 고무줄까지도 뽑아 낸다. 그러므로 일어설때에는 바지춤을 손으로 잡고 있어야 한다. 이 약점을 알고 두손을 들고 일어서라고 하면 아래도리는 자동적으로 발가벗겨져 버린다. 수치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다. 『너는 민족반역자다. 그러니 죽어 마땅하다. 솔직히 털어 놓치 않으면 살아 나갈 수 없다』는 이 사형선고와 같은 말들은 집결소에서 맨처음 듣는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는 살아 나올 수 없는 공포의 정치보위부 감옥안에서 제 정신이 없는 형편인데 이런 「사형선고」 말까지 들으면 정말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드는 것 같다.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속에서 감방의 첫날밤은 대낮보다 더 밝은 자유의 광야를 장장 헤메고 있는 모습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환각 속에서 몸부림 치다가 잠을 모두 설치게 된다. 자유로워도 자유로움을 못느끼고 살던 바깥 세상이 그처럼 사무치게 그리워져서 그 념원이 상상속에 실물같이 반영되는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