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
(전 북한 벌목노동자)

나는 대표부로 호송한 다음에도 대표부 안전부장이 마야가 사 회적 여론을 환기시킬 것 같아 쁘리모르 주경찰 책임자를 찾아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다시 탈출한 다음인 4월 8일 블라디보 스토크 라디오로 아침 6시 이렇게 방송하였다.

『대단히 위험한 인물인 북조선 공민 김호를 찾습니다.』
실로 그들은 나 때문에 두차례나 돈도 많이 쓰고 고생도 많이 했다.
지금 그들은 이렇게 많은 고생을 한 덕분에 러시아의 사회정 치계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고 있다. 앞으로 통일되면 무슨 말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하바로프스크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8시게 도착하였다.
15시간동안 달려왔다.

오는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약 300km를 외 돌아오다 보니 더 늦어졌다.
대표부 문 앞에 와서야 그들은 팔, 다리를 풀어 주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걸음을 떼려다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팔다리가 제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다리를 묶어 놓았기 때문에 두 다리가 시퍼렇게 피 가 죽어 있었고 두 팔은 뒤로 돌아가 붙은 것처럼 앞으로 당길 수 없었다.
나를 호송하던 사람들도 두 다리를 보도니 끔찍하였던지 달려 들어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이젠 다 왔으니 좀 휴식하면 일 없을거야.』

그들이 나를 무릎에 의지시키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는데 대표부 안전부장이 달려 나왔다. 그는 달려 나오며 호송했던 사람 들과 악수를 하더니 나에게 달려 들었다.
안전부 부주장의 무릎에 기대어 있던 나를 그는 사정없이 구 두발로 얼굴을 걷어 찼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서려는데 또 다시 주먹이 날아 들 었다.
나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또다시 달려들어 머리를 사 정없이 짓밟았다.
나는 아프지도 않고, 화 나지도 않고, 생각도 없었다.
안전부장의 씩씩거리며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놈의 입에다 자갈을 물리라고 했는데 왜 안 물렸어. 이 놈 을 당장 목을 매달아 죽이라고.』
나는 그 순간 집을 떠날 때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김호야, 나는 너를 소련으로 보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군복 무를 오래한 네가 사회 진실을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낸다. 네 가 명심해야 할 문제는 소련 벌목장이 군생활하고는 다르다는 것이 다. 나는 너에게 이름을 달아줄 때 언제나 용맹하게 살라는 뜻에서 호랑이 호자를 달아 주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 아버지의 이 뜻이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처신하기를 바란다.』
나는 차츰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자 대표부 간부들이 차례로 나를 보려고 들어왔다.
대표부 책임비서가 들어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일 어섰다.
나를 호송했던 부부장이 소개했다.
『책임비서 동지, 이 놈이 바로 김호입니다. 이 놈의 애비는 출 당 당한 사람이고 이 놈은 군관(장교)으로 복무하다 제대한 놈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소리쳤다.
『이 놈아 똑바로 서라!』
책임비서는 나를 한참 쳐다 보더니 점잖게 조용히 한마디 했다.
『음, 어떤 놈인가 했더니 쪼고마한 녀석이 그렇게 악바리였군.』
그리고는 내 가슴을 툭툭 치고는 나가 버렸다.
『이 놈의 애비는 출당이고….』
하는 말이 귓가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떠날 줄 몰랐다.

아버지는 북조선 로동당에서 출당 당했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 참가하고 전쟁후 오래동안 인텔리로서 교육부문에서 근무하였고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분이시다.
출당 당하게 된 이유는 아직 젊었을 때 아무러한 지식도 없는 당간부가 아버지에게 당생활을 잘하라, 사업방법을 고치라, 당에서 준 과업을 왜 실천 못했는가 하면서 너무도 심하게 닥달질하는 통 에 자존심이 살아난 아버지는 당원증을 그의 책상에 집어 던졌다. 사실 그때 북한식대로 계간하면 아버지의 죄는 정치범 수용소에 가 야했다.
그러나 당에서 아버지의 실력과 전쟁공로를 평가하고 출당, 파 면, 추방으로 대치했다.
막노동은 해 보지 못한 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깊은 산골 에 추방되어 온갖 고생을 하고 10년만에 재직되어 교원으로 일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복당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형 하나, 여동생 둘, 막내로써 남동생 하나, 이렇게 5 형제다.
형은 군복무 8년간 당에 입당하고 제대 후 대학으로 진학했다. 여동생들도 하나는 의학대학을 7년, 하나는 사범대학 4년 과정을 마 쳤고, 막내동생은 군에 복무하고 있다.
나 역시 군복무중인 22살의 어린 나이에 당에 입당하고 군관 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의 과거사로 인 하여 발전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아버지의 출당이라는 과거사때문에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내가 소련 벌목장으로 떠난 것도 이러한 인생의 고달픔이 많 이 작용했다.

제대 후 군단위원회에서는 나를 대학으로 추천하였으나 나는 아버지의 출당이라는 과거사때문에 대학을 졸업해도 크게 좋은 결 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비로드쟌 북조선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북조선 벌목장 감옥들은 비로비르쟌에 대표부 감옥, 체크로민 에 1연합기업소 안전부 감옥소, 띈다에 2연합기업소 안전부 감옥소 가 있다.(3연합은 새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리고 매 사업소 마다 안전부에 감옥이 있다.
안전부는 실지 안전부가 아니고 국가보위부 요원들이다.
북한의 국가보위부는 반정부 음모자들, 정치범, 간첩들만 취급 하는 비밀방첩기관이다.
바로 이러한 보위부 요원들이 외부의 여론을 피하여 여권을 일반공무여권, 벌목장내에서는 안전부라는 명칭으로 활동한다.
구체적인 조직형태와 임무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지적하기로 하겠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비로비쟌으로 호송할 때 부터는 그들의 태 도가 달라졌다.
소리치는 사람도, 때리는 사람도 없었으며 호송원들은 흔히 이 렇게 말했다.
『김호, 딴 생각 하지 말고 자기 비판을 잘 하고 조국에 나가 야지. 우리 당정책은 일사적인 과오를 범했다고 처벌은 좀 할 수 있 어도 다 교양해서 다시 혁명대오에 세워주는 좋은 정책이야. 김호 가 의식적으로 당과 수령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나는 비로비쟌에 4일간 갇혀 있었는데 그 기간 비판서 한 번 쓰는 것이 끝이었다. 심문도 아무 것도 없었다. 인정있는 계호들은 (국가보위부의 직업적인 간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담배도 한대씩 주었고 철창 사이로 농담도 주고 받았다.
나는 웃으며 그들과 농담을 하면서도 매 순간 순간 탈출할 기 회만 노렸다.

4일만에 나는 다시 체크로민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이 나를 이렇게 깊은 산골로 호송한 것 은 마야가 하바로프스크 대표부에 찾아와서 나를 내놓으라고 항의 했고 내놓지 않으면 유엔인권옹호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옐친 대통령에게 호소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2년전 한천 길 사건처럼 복잡하게 될 것 같아 산골로 빼돌린 것이다.
호송시 4명의 경찰이 호송하였는데 비로비드쟌에서 체코도민 까지의 중간지점인 띄르마에서 북조선 안전원들이 도중 검사까지 하였다.
체코도민 감옥소에 도착하여 감방에 들어서니 놀랍게도 작은 감방에(길이 5m, 너비 3.5m) 10명의 죄인들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 다. 맞은 켠에 또 하나의 감방이 있는데 거기에는 16명이 갇혀 있 다고 한다.
더러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온 몸에 이가 얼마나 많은지 처음엔 더러워서 음식도 못 먹고 잠도 잘 수 없었다.
도착한 다음 날이다.(3월 29일.)
간수가 들어 오더니 특별히 나에게만 다리 키부스를 대고 풀 지 못하게 철사로 결박해 놓는 것이었다.
『아니, 이거. 감방 안에서도 다리에 수갑을 채우는 가요?』
하고 나는 투덜거렸다.
『상부의 특별지시니 할 수 없어. 어쩌겠나 좀 참으라고.』
그리고 옆에 있는 한 죄인에게 내가 불편이 없도록 움직일 때 면 도와주라는 것이다.

3월 30일.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은 1연합안전부 경제감찰 상급지도원이 담당했는데 그는 내 말을 듣고 진술서를 쓰고 나는 나대로 비판서를 썼다.
그는 아주 교활한 사람이었다.
심문할 때는 담배를 주고 나를 불쌍히 생각하는것처럼 도망쳤 으면 잡히지 말아야지 잡히면 되는가 하는 식으로 좋게 심문하였는 데 그가 작성하는 진술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법조항대로 한다면 나에게는 아무 죄도 없기 때문에 사상비판 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는 남조선 대사관이나 목사들을 만난 일은 없는 가 고 물었다.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가지고 쓴 나의 비판서와 그가 작성한 진 술서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내용을 분석한 각도가 정치적으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부인하였으나 그가 강박하고 또 나 역시 죽으면 죽었지 북한으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확고했으므로 인정 한다는 손도장을 찍어 버렸다.
심문이 끝나고 감방으로 돌아온 나는 소름끼치는 끔찍한 광경 을 목격하였다.
이가 너무 많아서 소독한다며 간수가 지켜 서서 의약독소를 (살충제의 일종) 매트리스와 이불에 치고 모든 사람의 속옷에 헥사 (역시 살충제의 일종)를 뿌리라는 것이었다.
간수가 나를 보고 헥사를 몸에 치지 않으면 이들이 모두 나에 게 모여든다며 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약을 다 친 다음 죄인들이 냄새가 빠질 때까지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자고 하자 간수는 간부들이 보면 괜 히 욕만 먹는다며 좀 참으라는 것이었다.

4월 2일 오후 5시경이다.
나더러 옷을 다 입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나가자 1연합 안전부장이 나를 보고 오늘 저녁 차로 조국으로 나가게 되었다며 열차에서 주의할 점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김호 동무. 절대로 걱정하지 마시요. 조국에 나가면 아마 약 1~2년 노동교양소에서 고양을 받게 될 거요. 우리가 김호 동무의 문건을 그렇게 작성하였소. 그러니 열차로 가는 도중에 호 송안전원들에게 애를 먹인다든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다르게 취급 될 수 있소.』
그리고 나를 호송하게 될 안전원들을 소개하였다. 모두 4명이 었는데 모두 50대의 사람들이었다.
북조선 국경인 하싼까지 나가자면 3일이 걸려야 한다.
나의 운명에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남았다.
나를 죽게 할 수도 있고, 살게 할 수도 있는 바로 그 3일. 나 는 그 3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기도할 줄도 몰랐으나 속으로 이 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나에게 주어진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300년으로 길 게 하여 주십이요. 그리고 그 3일 기간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나에게 저 4명의 경찰을 단번에 제껴버릴 수 있는 장수 힘을 안겨 주십시요.』

안전부장이 시간이 되었으니 나가자고 하자 호송원들이 다리 키부스 상태를 조사하고 한쪽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수갑의 한쪽에 는 30kg 트렁크를 매달았다. 그렇게 트렁크를 달아 놓으니 여행을 떠난 평범한 사람 같았다. 러시아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거짓과 논속임으로 일생을 살고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충실 한 개들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기발한 착상이다.
안전부장이 역에까지 따라 나와 바래주었다. 어느덧 열차는 출발하였다.

여행 노정은 다음과 같았다.
4월 2일 저녁 9시경 우르갈(체크도민에서 40km)에서 띈다-블 라디보스토크행 열차로 우스리스크까지(4월 4일 정오 12시 도착), 우 스리스크에서 3시간 후인 15시경 블라디보스토크-하싼행 열차를 갈 아 타면 4월 5일 새벽 1시경에 도착하고 바로 4월 5일 그날로 국경 을 넘게 되었다.
나는 탈출계획을 이미 세웠다.
1. 열차에서 화장실에 들어 갔다가 창문을 깨고 달리는 열차 에서 뛰어 내린다.
2. 수갑을 푸는데 성공하면 밤에 당직 근무를 때려 눕히고 열 차에서 뛰어 내린다.
3. 우쓰리스크에서 갈아타는 기회와 하싼에서 세관검사를 받 기전까지 기회를 이용한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마지막 최종계획을 세웠다.
1. 탈출이 실패하면 마지막 하싼역에서 홈으로 들어서는 열차 를 머리로 들이 받는다.
2. 일단 세관검열이 끝나면 러시아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감 시한다. 그때 러시아 군인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빼앗는 것처럼 하 면 그들은 나에게 사격할 것이다.

열차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호송원들에게 담배 한대 피울 수 있는 가고 하자 두 명이 열차 승강대에 따라 나와 같이 피웠고, 변 소에 들어가자 변소문을 닫지 못하게 하고 한 명이 변소에 따라 들 어왔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또 변소에 들어온 호송원의 감시로 첫번째 탈출계획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두 명이 변소에 들어가 문도 닫지 않고 대소변을 보는 꼴을 본 러시아인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자리에 눕자 호송원들도 2명은 자리에 눕고 2명이 앉아 서 나를 지켰다. 한두시간 지나서 내가 자는 척 하자 세명이 잠들 고 한명만 당직근무로 남았다.
나는 감방에 있을 때 탈출준비로 바늘 한개, 빈침 한개, 50mm 못 한개를 준비하였는데 바늘과 빈침은 수갑을 열기 위한 것이었고, 못은 다리 키부스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감추었던 바늘과 빈침으로 수갑을 열기 시작했는데 날 밝을때까지 아무리 애를 써도 열 수 없었다. 날이 밝으며 열차 안 이 훤해지면서 나는 잠들었다가 오전 11시경 경찰들이 깨워서야 자 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될수록 그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이야기를 자연스럽 게, 그리고 탈출하여 남의 나라에서 살아보니 제 나라 제 땅이 제 일 좋더라는 식으로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처럼 말하자 그들도 긴장을 좀 늦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희들끼리 조국에 대한 은근한 불평을 부리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말을 통하여 최근에 김정일이 새로운 체제수호 구루빠 《비사회주의 구루빠》를 조직하였으며 그 구루빠는 이전에 많은 통제구루빠들이 조직되었던 다른 것들 보다 비할 바 없이 큰 권한을 가지고 무자비하게 감독, 통제한다는 것이다.
북조선에서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그의 미래에 이상이 생길 때 마다 이러한 광신적인 놀음이 벌어진다.

나는 그날도 저녁식사후 바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날은 확실히 감시가 덜 하였다.
당직근무를 서면서 자리를 비우고 승강기에 나가 담배를 피우 기까지 하였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 무진 애를 쓴 끝에 나는 수갑을 푸는데 성공하였다.
수갑의 열쇠 구멍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었는데 걸턱짬 으로 빈침을 밀어 넣고 걸턱 3칸을 넘겼다. 나는 너무 기뻐 함성을 지를뻔 했다.
수갑에서 가만히 손을 뽑아 보았다. 손이 힘들게 빠져 나왔다.
이젠 다리에 건 키부스가 문제였는데 10mm 철근으로 되었기 때문에 힘을 주어 구부려 놓으면 불편하기는 하나 뛸 수는 있었다.
나는 날 밝기 전에 두번째 계획대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하 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당직근무가 근무교대하고 잠 이 오지 않았던지 맥주를 꺼내 놓고 둘이서 같이 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 그가 얼마나 미웠던지….

내가 자는 줄 알고 그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김호 저 놈은 날쌘 놈이야. 카자흐스탄에서 얻은 색시도 참 곱게 생겼다는 거야. 그리고 돈 두 많이 벌었다면서? 도망친 놈들 은 대체로 남의 집에서 일해 주면서 산다는데 저 놈은 다르거든.』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옆에 사람이 맥주를 쭉 들이 마시며 말했다.
『도망쳤으면 집히지 말아야지. 잡힌 다음에 그게 필요 있어? 그런걸 보면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머저리야. 소문은 저 놈이 소련 여권까지 다 만들었다고 하던데 허튼 소린것 같아. 여권만 있으면 잡지 못하게 되어 있거든.』

그러자 이 쪽 사람이 반박했다.
『여, 여, 붙잡지 못할게 뭐야. 한천걸이는 붙잡아다가 원래 계 획은 참통(벌목정 사람들이 3년간 일하고 귀국할때 번돈으로 상품 을 사서 포장하는 두꺼운 판자로 만든 통)에 넣어가지고 조국에 내 가자고 했어. 그런데 세관검열할때 탄로나면 그건 큰 일이거든. 그 래서 비행기로 호송하려다 잡혀서 러시아측에 빼앗겼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북조선측) 뭘 하는 것 보면 좀 우둔해. 사람을 어떻 게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도망칠 수 밖에 있어. 지금 노동자들이 한 달에 70루불 밖에 못 탄다는 거야. 한달 생활 비가 담배한갑 살 돈도 안되는데 누가 좋다고 하겠어. 그래서 일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가는 초께르(묶어서 조국으 로 소환한다는 것) 될까봐 무서워서 돌아오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 는 거지.』
하면서 투덜거렸다.

어느덧 날 밝기 시작했다.
열차는 우쓰리쓰크에 거의 도착하였다.
호송을 책임졌던 안전원이 트렁크를 매달았던 수갑을 풀어 양 손을 다 수갑에 채웠다.
왼쪽 팔목의 수갑 상태를 검열할까봐 긴장하였으나 검열하지 않고 다리에서 키부스 상태만 검열하였다.
열차는 어느덧 우쑤리쓰크에 도착하여 우리는 열차에서 내렸 다. 여기서 3시간 후에 국경역인 하싼으로 나가는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우리 일행은 역대합실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 다. 호송을 책임진 안전원이 열차표 사러 가자고 하며 다른 한 명 을 데리고 갔다.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좀 앉고 싶다고 말하고 지함 위에 걸터 앉았다. 내가 앉 자 그들은 담배를 피우라며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별 다른 의심은 갖지 않는 것 같았다.
『김호, 러시아 사람들이 수갑을 보지 않게 저쪽으로 돌아 앉 아 피우라구.』
나는 돌아 앉아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하여 바지 가랑이를 뜯 었다. 왜냐하면 다리 키부스를 발목과 허벅다리에 원형으로 된 철 근을 대고 발목과 허벅다리 사이에 10mm 철근으로 잡아 주었기 때 문에 다리를 구부릴 수 없었다. 때문에 뛰자면 철근을 구부리면 되 는데 바지 가랑이가 좁아서 대단히 불편한 것이다.
준비는 다 되었다. 열차표를 사러 갔던 두 명의 호송원들이 오 기 전에 빨리 행동해야 했다. 나는 슬그머니 솜옷의 쟈크를 벌려놓 고 호송원에서 말했다.
『지도원 동지, 솜옷 자크를 좀 채워주십시오. 밖에 나오니 좀 추운데요.』
그러자 호송원이 웃으며 투덜거렸다.
『김호, 나는 너 때문에 고생이 많아. 변소에 따라 다녀야 하 지. 쟈크를 채워 달라, 벗겨 달라, 그러나 괜찮아. 이건 농담이고 한 대 더 피울래?』
그가 자크를 한 반쯤 올려 채웠을까. 수갑에서 한쪽 손을 재 빨리 뽑아 그의 두 어깨를 잡고 힘껏 머리로 받았다. 제대로 명중 한 것 같았다. 그는 윽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싸 쥐고 비틀거렸다. 두번째 호송원이 얼마나 당황했던지
『어- 어- 야 김호- 김호.』
하며 달려들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나는 팔목의 수갑을 쳐들어 보이며 달려 들기만 하면 죽인다 고 하며 뛰려고 하는데 그가 달려 들었다. 나는 발로 힘껏 걷어 찼 는데 똑바로 맞지 않았는지 또 달려 든다.
나는 한쪽 팔목에 걸려 있는 수갑을 휘둘러 그의 머리를 힘껏 들이쳤다. 그리고 발로 다시 한번 걷어 차자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힘을 주어 다리를 굽혀 키부스 철근을 구부린 다음 달리 기 시작했다.
불과 3~4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등 뒤에서 서라는 고함이 들렸다. 한 100m 달렸을까. 뒤를 돌 아 보니 한 50m 뒤에서 한 사람이 따라오며 소리쳤다. 나는 장난이 심했던 어린시절처럼 주먹을 쳐들고
『이거나 먹어라』
하고 소리치고 그냥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에 닫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골목길로 한참 달리다 돌아보니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못으로 키부스를 풀었다.
그리고 또 달렸다.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러시아 제1텔레비젼 방송국 기자 와씰린 우뚜 낀이었다.
『시베리아 북조선 벌목장에 갔던 기자 조사단이 도착하였습 니다. 오늘 오후 3시에 인터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장소는 당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당신이 선택하는 임의의 장소로 우리가 찾아가겠 습니다.』
나는 탈출한 후 러시아 옐친 대통령에게 정치망명을 신청하고 인권옹호위원회, 법률가협회에 시베리아 북조선 벌목장에서의 인권 유린행위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기자 조사단이 조직되어 벌목장 취재를 진행하였고 나의 고발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약속대로 오후 3시 인터뷰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러시아 땅에 서 북조선 경찰들이 러시아 경찰들을 개별적으로 돈으로 매수하여 러시아 공민들의 인권까지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탈출 후 있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나 :『4월 4일 나는 탈출하여 택시를 타고 불라디보스토크에 있 는 마야에게로 찾아 갔습니다.』
기자 :『돈이 없었을텐데 택시를 어떻게 탔습니까?』
나 :『예, 저는 집에 가사 돈을 물기로 하였지요. 집에 도착하니 오후 5시쯤 되었는데 마야는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제 가 들어서자 꿈인지 생신지 분간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자 :『참으로 그때는 감격적인 상봉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 :『그 다음날 오전 11시경에 북한 경찰들이 러시아 경찰을 데 리고 마야가 살고 있는 와로느(마야 언니)네 집에 와서 가택수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다른 곳으로 피신했지요. 나를 찾지 못한 북 한경찰들은 무려 45일간 그 집과 마야의 맏 언니 이리나의 집, 이 리나의 딸 나시쨔 집을 포위하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마야와 친 척들의 뒤를 미행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마야를 만날 수 없기 때문 에 전화로 마야에게 빨리 경찰서에 찾아가 항의하고 옐친 대통령과 인권위원회에 고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찰측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러 시아 경찰을 마야 언니 와란네 집으로 보낸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 다. 그후 4, 8일 두 번째로 그들이 찾아왔는데 그때 와란이 러시아 경찰에게 이름을 대 줄 것과 합법적으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문 건이 있는 가고 따지자 그는 황급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 자 그들은 이리나의 딸 나시쨔 집에 찾아 갔는데 그때 나시쨔는 이 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썩 사라져라. 어디서 이따위 사람들이 나에게 왔는가.
그러나 그들의 감시와 미행을 계속 되었습니다.
미야가 두번째로 경찰에 찾아가 항의하자 북조선 경찰들은 더 는 합법적으로 감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어 그들은 아파 트에 자리를 잡고 러시아 인을 돈으로 매수하여 개인 자가용차를 대기시키고 차안에서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한달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숨어 있다가 모스크 바에 와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였습니다.』
기자 : 『한달 동안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숨어 있었습니까?』
나 :『물론 있었지요. 남조선에서 오신 목사 이강수, 정득수 님 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처지였으나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나를 친형제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뜨거운 민족애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자 :『앞으로 망명이 승인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나 :『고마운 러시아를 위해서 일할 것이고 조국의 통일을 위해 서 일할 생각입니다.』

기자는 그날 통일이 왜 안되는가? 핵사찰문제를 어떻게 생각 하는가?
심지어 13차 세계(평양)청년학생축전때 자기 친구가 참가하였 는데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평영은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더라고 하던데 그 문제들까지 질문하였다. 끝으로 그는 나의 앞길에 기쁨과 행복, 영광이 있기를 빌었다. (러시아 제1텔리비젼 방송) 정치 국 프로그램으로 7월 2일, 7월 9일 두번 방영하고, 러시아 라디오도 6월 18일, 러시아 주간정치잡지 『(새소식) 27호도 나에 대한 실기가 실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이 불행한 청년의 운명은 옐친 대통령의 손에 달려있다.』
라고….

나는 모스크바 어느 한 대학의 기숙사에서 한동안 숙박하였는 데 우연히 남조선 유학생 권세운을 알게 되어 그와 친구가 되었고 그의 소개로 동부유럽 학생연수단을 오늘까지 4번 만난 간담회를 가졌다.
그들은 모두 20대의 청춘들이었고 보고 싶어 했고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젊음과 낭만에 넘친 그들의 얼굴에서 통일된 조국의 미 래를 보았고 산 좋고 물 맑은 삼천리 금수강산의 신선함을 느꼈다.
파란 곡절의 언덕과 언덕을 넘은 나의 남행길. 남행길의 저 한 끝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한 여름의 동 트는 새벽! 차분히 내려앉은 청신한 이슬 방울 들이 희미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조만간에 아침은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