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
(전 북한 벌목노동자)

병원 탈출

그 날 저녁 10시경. 나는 같은 병실에 있는 러시아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문을 나섰다. 환자복 차림으로 택시에 올라탄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으나 탈출해야 한다는 오직 한가지 생각으로 참고 또 참았다. 택시 운전수는 40대 중년의 조선인 교포였는데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의 집은 병원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마침 혼자 사는 홀아비였다.
그의 집에 도착한 나는 금시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 얼마나 급했던지…. 나는 조심스럽게 수술자리에 붙여 놓은 붕대를 뜯어보았다. 약 15cm 찢어진 자리를 실로 드문드문 기웠는데 너무도 끔찍스러워 보기가 무서웠다.

옆에서 보고 있던 마야와 택시 운전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니, 마야. 왜 이렇게 많이 찢어졌어?』
마야가 붕대를 도로 붙여주면서 말했다.
『처음 찢어진 건 3~4cm 정도이고 병원에서 내장기관을 검사하느라고 다시 그렇게 많이 수술했어요. 김호, 혹시 이제라도 다른 병원으로 가면 안될까요. 약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치료받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야에게는 참으로 힘에 부친 일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조금이나마 의료부문에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마야는 전혀 상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요한 약명을 마야에게 알려주었다. 수면제, 항생제, 소독 알콜.
그러자 마야는 자기 손가방에서 약을 꺼내 놓았다. 놀랍게도 여러 가지 약들이 많이 나왔다.
『이 약들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주었어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러면 그들이 알고 있어?』
『아니예요. 그들은 혹시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주었어요.』
그제서야 나는 짐작이 갔다. 병원에서 나올 때 입원실 복도에서 항상 대기 근무를 서던 의사, 간호사들이 한 명도 없었고 나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병원에서 탈출한 나는 6일간 택시 운전수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옛말이 맞는 것 같았다.
택시 운전수의 친누이 류바가 유치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초보적인 위생상식은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두세 번씩 나를 치료하여 주었다.
6일만인 3월 24일 내 손으로 배에서 실을 뽑은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조금씩 걷기 시작했고, 음식도 께피로(우유로 만든 시큼한 것)를 조금씩 마셨다.
우리는 그 날 저녁에 다시 먼 곳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마야는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내가 고집을 부렸다.

황무지 생활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누끄스(까랄까박스딴 공화국 수도)였다. 까랄까박스딴은 우즈벡키스탄에 속해 있는 자치 공화국인데 언제나 땅 위에는 소금이 하얗게 깔려있는 간석지 땅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500여년전에 바다였던 자리라고 한다.
우리는 먼저 버스로 잠불에서 싸마르칸까지 하루 반, 사마르칸에서 누꾸스까지 열차로 2일간 가기로 했다. 여비는 마야 어머니가 해바라기 씨를 조금씩 팔아 모아 둔 돈이라며 3천루블을 가져다 주었다. 떠날 때 류바와 그녀 동생 택시 운전수가 우리를 바래주었다.
『배에서 실을 뽑았는데 나는 어쩐지 믿음이 안가요. 여행길에 배에 힘을 주거나 육체적으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리고 급한 경우 서슴치 말고 구급차를 부르세요.』

류바가 마야의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우리는 경찰의 눈을 피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경찰측에서는 소동이 일었다. 우선 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올 책임추궁이 두려웠다. 특히 하바로프스크 체크도민 경찰서 책임지도원 김와실리는 내가 수술한 다음날 밤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식을 듣고 혼이 빠진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지고 말도 제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배를 가르고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을 때 급히 나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칼은 어디서 났는가…. 후에 누가 물어 보면 칼로 배를 찔렀다고 하지말고 밖에서 넘어지면서 쇠꼬챙이에 찔렸다고 말해야 한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철직(파면)되었다. 당시 나에 대한 사건으로 서로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논쟁이 많았다고 한다. 북조선측에서 항의했기 때문이다.
책임은 김와실리에게 있었다. 그는 나를 업신여기고 거들먹거리며 수갑도 채우지 않았다. 또 호송 당시 몸수색도 하지 않았고, 병원에서 나에 대한 감시근무조를 조직하지도 않았다. 마야의 말에 의하면 김와실리가 감시조를 배치하려고 하자 병원의 의사·간호사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호의 생명이 지금 대단히 위급한데 경찰이 감시까지 하면 그는 견뎌내지 못할 거요. 그러니 한 며칠 안정이 된 다음 감시해도 될 거예요.』

나는 북조선 안전원들과 김와실리에게 그리고 나를 잡으라고 달러를 보낸 김정일에게 골탕을 먹인 것이 참으로 통쾌하였다.
버스와 열차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누꾸스에 있는 마야의 이모집에 도착하자마자 심하게 앓기 시작하였다.
수술 후 실을 아무런 소독기구도 없이 혼자서 뽑고 어지러운 버스와 열차로 장거리여행을 하면서 치료를 받지 못하여 배 안으로부터 곪기 시작하였다. 바로 명치 끝부분이 안으로부터 곪기 시작하였는데 주먹만한 고름덩어리가 명치 끝부분의 밸을 짓누르면서 나는 몇 차례 정신을 깜박깜박 잃곤 했고 마야는 어쩔 줄 모르고 나를 잡고 울기만 했다.
나는 근 한달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조선인 교포 의사가 밤에 몰래 찾아와서는 주사기로 고름을 뽑아내면서 치료해 주곤 했다.

나는 5월 중순까지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이상 다시 남행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엇이든 할 일을 찾았다. 세계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황무지의 땅 까랄 까박스딴의 누꾸스에서는 의지해 볼 데가 어디에도 없었다. 자유를 찾아 떠나자고 해도 돈이 필요했고 당장 먹고살자고 해도 돈이 필요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황무지 땅에 해바라기 씨를 뿌리기로 결심하고 시골로 찾아갔는데, 아무리 찾아보아야 식물이 자랄만한 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돌멩이 하나 찾아볼 수 없고 뜨거운 햇빛을 피하자고 해도 산도 나무도 없다보니 피할 데가 없었다. 밭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강이 흐르는데 강에는 물이 아니라 감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황무지 땅에 해바라기씨를 뿌렸는데, 심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메마른 감탕이 먼지로 변해버린 땅이다 보니 어렵지 않게 꼬챙이로 꾹 누르고 씨를 넣고 손으로 꽁꽁 다지면 그만이었다.
나는 해바라기 씨가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금석인 듯 정성을 다하여 심었고,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데다 제대로 먹지 못해 제 몸 하나 겨우 움직이면서도 매일 물을 길어다 주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강에 나가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들이곤 하였는데, 그 감탕물에 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매일 3~4시간 정도 잡으면 메고 오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나에게는 먹고 살 식량이 마련된 셈이다. 그 물고기를 가지고 원주민들과 빵, 소금, 기름, 고추가루 등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까랄까박쓰딴의 원주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낚시질도 할 줄 몰랐다.
그 원주민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30대의 사람들이 한국인 50대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이 마시는 음료수는 흐르는 감탕물이었다. 문화 수준도 많이 뒤떨어져 있고, 대체로 목화생산을 하면서 사는데 소연방 자체가 쓸모 없는 불모의 땅으로 여겨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정성이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더니 그 황무지 땅에서 해바라기가 돋아났다.
나는 너무 기뻐 밤낮으로 그 해바라기를 쓸어 만지며 밭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누꾸스 시내로 식료품을 구하러 이틀간 나갔다 왔는데, 겨우 자라난 해바라기들이 6~70% 정도 햇볕에 타 죽어 버렸다. 나는 그때 막막하고 안타까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가꾼 해바라긴데 이렇게 무참히 태워버릴 수 있는가.
해바라기 씨를 팔아 돈을 장만해 자유를 찾아가려던 희망은 하루사이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먹고 살 돈도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물고기를 잡아서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

마야의 정신적 성장

나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마야의 언니들이 무엇 때문에 여권도 없이 숨어 다니는 사람을 따라 다니며 고생하느냐고 하면서 좋은 신랑감(집도 있고 차도 있는)을 찾아놓고 기다린다며 나를 내버리라는 것이었다. 마야는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몰래 울며 지낸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어느 날 나는 마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야, 나 지금까지 이렇게 도와주어 대단히 감사해. 나는 이젠 떠나야 할 것 같아. 나는 마야 때문에 다시 살아났고, 마야는 나 때문에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마야, 이제 조선이 통일되면 신세를 값기로 하고 지금은 떠나야겠어.』
마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손가방에서 언니들한테 온 편지를 찾았다.
편지들이 없어진걸 알자 마야는 웃으며 말했다.
『머저리, 나는 이런 편지를 5년전부터 받아 왔어요. 그런 말은 그만두고 죽을 때까지 내 승인 없이 아무데도 갈 생각을 마세요.』
그리고 나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런데 당신은?』
나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아마 마야는 나를 따라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움튼 것 같았다.
마야에게 미안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신적으로 몰라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했다.

어느새 마야는 나를 사랑하게 됐고, 내가 자유를 박탈당해야 할 아무러한 이유도 없으며, 북조선의 김일성, 김정일이 얼마나 나쁜가를 나에 대한 사랑 속에서 나를 추적하는 북조선측의 집요한 태도에서 똑똑히 알게된 것이다.

내가 두 번째로 북조선 경찰에게 체포된 다음 마야는 울며 따라다니지 않았다. 마야는 북조선 국가보위부 요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남의 나라에서 주인행세를 하는가. 당신들이 김호를 내놓지 않으면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하고 국제적십자사와 옐친 대통령에게 신소하겠다.』

타슈켄트에서 만난 행운

1992년 6월 17일 우리는 짐을 꾸려가지고 누꾸스를 떠났다. 짐이란 옷가지들과 부엌 세간 살이라 할 수 있는 그릇 몇 개였다. 나는 육체적으로 일할 형편이 못되었으나 일을 해야 하며 자기 힘으로 생활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먼저 타슈켄트에 도착하였다.

돈 2천루블을 가지고 떠난 우리는 실로 정처 없이 방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타슈켄트에는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가라따우(마야 어머니집)에는 경찰들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역 대합실에서 이틀을 자면서 임시거처 할 수 있는 거처지를 찾았는데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우리를 누구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3일만에 우리는 조선인 교포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그 할머니는 풍 만난 반신불수였다.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아 키운 할머니는 늙으막에 불구가 되어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았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고 돈을 받지 않을 테니 같이 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제 손으로 음식도 끓이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가 불쌍하고 우리 역시 갈 곳이 없는 처지여서 같이 살기로 했다. 그런데 경찰서 의사로 근무하는 할머니 맏아들이라는 사람이 우리 처지를 알고 나를 찾아와 말했다.
『당신이 살 데가 없다니까 마침 잘 됐어. 우리 어머니를 좀 돌 봐주면서 같이 살겠다면 내가 일자리도 구해주고 잘하면 여권도 만들어 줄 수 있어. 당신은 아마 이렇게 좋은 집을 아무데서도 얻지 못 할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세상이 복잡하다더니 별 못난 놈 다 보겠다는 생각이 들며 내 처지가 얼마나 가련한지 부끄러웠다.
나는 아무리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어도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가 당신 어머니를 돌봐주면 돈을 얼마나 주겠어?』
하고 그에게 빈정거렸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들고
『뭐, 뭐, 뭐라구』
하며 기겁해서 소리쳤다. 나는 웃으며 또 한마디했다.
『돈을 내지 못하겠으면 당신이 어머니를 잘 돌보라구.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돈을 주지. 한 달에 얼마면 되겠어?』
그는 이 말을 듣더니 얼마나 화가 났던지 금새 나에게 달려들 어 때릴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마야가 나에게 대들었다.
『아니 싫으면 싫다고 하면 그만이지 남의 집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됐어. 마야 가자구.』

우리는 짐을 끌고 또 길을 떠났다. 어디로…? 마야는 울며 나 는 짐을 끌고 한참을 가고 있는데 어느 한 건물로 조선인 교포할머 니들이 노래를 부르며 밀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아보니 한국인 목사가 차려 놓은 교회란다.

『마야, 우리도 한 번 들어가 볼까?』
마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총알같이 내 쏘았다.
『아니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 꼴을 해가지고 어디로 간다구 그래요.』
아직도 자기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여성으 로서의 특성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마야. 교회는 하나님께 구원해 주십사고 다니는 것 이지 잘 살아서 하나님께 빵조각을 섬기는 데가 아니야.』
마야는 마지못해 교회로 따라 들어갔다. 교회에는 꽤 많은 사 람들이 모여 있었다. 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가 조선말로 설 교를 하였는데 모두 허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젠장, 나에게는 현실적인 구원이 필요하지 이건 모두 허황한 것들 뿐이야.)
설교가 끝난 다음 나는 목사를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를 찾아갔다.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어요. 당신은 미국의 의학박사 가 쓴 책을 읽고 꿈에서 그 내용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건 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혼에서 육체로 돌려 보낸 거예요. 하 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길이 열릴 거예요.』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 겠지」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너무 힘들고 어려웠으며, 또 여기 소련 땅에는 아버 지도, 엄마도, 친척도,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가 마음 속 으로 그 어떤 기둥을 세워놓고 오직 그 기둥의 힘을 믿고 살아나가 야 하며, 바로 그렇게 할 때만이 희망과 포부가 뚜렷해지는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이것이 생명수처럼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는 역대합실에서 자고 다음날 또 교회로 찾아갔다. 그날 목사는 조국통일을 위해 설교를 했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걸어 주었다.
설교가 끝나고 모두 헤어질 때 한 할머니가 찾아와 갈 곳이 있는가고 물었다. 갈 데가 없다고 하자 할머니는 자기의 가까운 친 척 주소를 적어주며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소대로 찾 아가자 집주인 그리샤는 전화로 연락을 받았다며 대단히 반가와 하 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식사를 권하고 술까지 한잔 부어 주었다. 나는 수술 후 경과가 나쁘기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고 오래간만에 구수 한 장국 한그릇을 다 먹었다.
식사 후 우리는 집주인과 함께 우리가 살게 될 집으로 갔다. 그리샤는 집 두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집은 비어 있었다. 집에 가 보니 난방과 목욕탕까지 모두 가스로 된 현대식 문화주택이었고, 마 당에는 포도넝쿨이 우거진 실로 좋은 집이었다. 집에 들어가 보니 방은 모두 4칸이고 냉장고와 침대까지 다 있었다. 마야는 너무 기 뻐 나에게 매달려 울기까지 하였다.

집주인 그리샤는 53세된 조선인 교포인데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집 값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면 한달에 350루블씩 주고 지금 당장은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쌀, 소금, 기름같은 것을 돈 도 받지 않고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제 집에서 목욕을 하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자리에 누웠다.
『김호, 이건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 같아요.』
『엉? 이것 봐라. 교회로 들어가자고 할 때는 당나귀처럼 두 발 을 딱 버티고 안들어 가겠다더니 이제야 알았어?』
우리는 남 몰래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 행복한 밤, 따 뜻한 사랑을 속삭이며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장사를 시작했고 친구들도 사귀었다.
친구들은 돈 5만루블이면 여권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불편한 몸으로 타슈켄트에서 비스께크(게르기즈스딴 수 도)로 다니며 물건을 사서 팔곤 하였다. 밑천은 남에게서 꾼돈 3천 루블이었다. 밑천이 작다 보니 아무리 애를 쓰며 뛰어 다녀도 돈은 불어나지 않았다. 특히 여권이 없기 때문에 시장에서 하루종일 물 건을 팔면서 경찰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