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
(전 북한 벌목노동자)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는 길

할아버지는 그 날 오후 2시경에 돌아왔는데 자기가 잘 아는 교포 할머니 한 분이 친척 방문으로 일시 남조선으로 가게 된다고 하며 그 수속 때문에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일시 떠난다는 것이다. 그 날 저녁 나는 노인과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갔다. 할머니는 나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북조선 사람들이 불쌍하다느니 김일성이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느니 하면서 한참 말하고 나서, 자기는 모스크바에 못 가고 자기 사위가 자기 여권 수속 때문에 일시 모스크 바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집에서 자고 아침에 사위를 만나 토론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위(오쎄르게이)를 만났는데 그는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어떻게 가겠느냐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증명서 없이 가자면 열차로 가야 하는데 열차는 7일간 가야 해요. 그런데 나는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낼 수 없어요.』

할머니가 옆에서 어떻게 잘 생각해보고 도와주라고 하자 쎄르게이는 한 가지 방법은 남의 신분증을 빌려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인데 이건 위험하고 또 신분증을 빌리자면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담하게 한 번 해보리라 마음먹고 신분증을 빌리는데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 2~3천 루블이 면 된다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미화 100달러와 소련돈 4,500루블이 있었는데 100달러를 내주면서(당시 1달러는 40루블 정도) 신분증도 빌리고 비행기표도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쎄르게이는 내일 당장 떠나자고 하면서 잠간 나갔다 들어오더니 신분증을 빌리려고 했던 친구가 출장가고 없으니 며칠 후에 떠나자고 하였다.

며칠 후인 9월 6일 저녁 쎄르게이는 나를 찾아와 신분증과 비행기표를 다 준비했으니 내일 아침 11시 비행기로 떠나자고 하면서 신분증의 이름과 생년월일 같은 것을 외우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쎄르게이와 그의 처 오따찌야나와 같이 비행장으로 나갔다. 우리는 혹시 북조선 안전원들이라도 있을까봐 으슥한 곳에서 약 15분가량 기다리는데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실 분들은 개찰구로 나오라는 안내 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극도의 긴장으로하여 쿵쿵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귓가에까지 울렸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경찰은 신분증을 대조하지도 않고 그냥 통과 시켰다.
후- 하나님! 그때 시간은 하바로프스크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경이었는데 7시간만에 모스크바로 날아오니 모스크바 시간으로 아침 10시 40분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린 후 나는 『후- 이젠 됐구나.』하고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날씨는 안개가 꼈는지, 구름이 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음침하고 안개같은 가는 이슬방울들이 쌀쌀한 바람에 실려 온 몸을 감싸며 우수수 떨려났다. 그때 음침한 모스크바의 날씨와는 달리 나의 가슴은 성공하였다는 기쁨으로 가볍게 설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의 앞길에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의 언덕과 간고한 시련의 가시 덤불길이 놓여 있었다. 파란 곡절이 놓여 있는 자기의 운명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우리는 공항에서 모스크바 안내 약도를 하나 사들고 대사관을 향하여 떠났다. 달리는 차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노라니 생각했던 모스크바와는 너무도 달랐다. 어둠에 잠긴 듯한 음침한 날씨에 건물들도 대체로 구식 건물, 말 한 마디 없이 차를 모는 운전수 역시 무뚝뚝한 표정이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세계적인 대도시라고 생각하니 잠자고 있는 크나큰 괴물과도 같았다.

한국대사관에서 일어난 일

대사관에 도착한 나는 오쎄르게이에게 대사관의 대사님을 좀 찾아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오쎄르게이는 대사관 관원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 관원은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북한에서 오셨다지요. 이 방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대사님은 안 계시구요. 참사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회의실 같은 방을 가리 켰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바로 이 사람이 북한에서 타협할 수 없는 원수로 알고 있던 남조선 사람이로구나. 하 고 생각하니 등골로 식은땀이 쭉 흐르는 것 같았다.

그가 가르키는 방에 들어가니 대사관 가족인 듯한 중년 여인과 처녀 한 명이 포도를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들은 앉으라고 의자를 권하였다.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한 쪽 벽에는 남조선 대통령 노태우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남조선 국기가 세워져 있고 맞은편에는 세계 지도와 책장이 놓여 있었다. 처녀가 우리에게 포도를 먹으라고 권하면서 소련에서 사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처녀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아마 소련에서 산다고 하니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예, 친척 방문으로 남조선에 가려고 여권 수속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처녀는

『아이,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

하면서 뭔가 더 물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후리후리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면서 여자들에게 옆방에 가 있으라고 일렀다. 그들이 나가자 그 사람은 자기는 대사관의 최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고 나 역시 내소개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왔느냐는 최선생님의 물음에 남조선으로 망명하려는 나의 결심을 이야기하고 오쎄르게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쎄르게이 말을 듣던 최 선생은 순간에 낯색이 달라지면서 쎄르게이더러 밖에 나가 좀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나가자 최 선생은

『김 선생이 망명하겠다면서 저 사람을 믿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가. 이런 일은 그런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미안하지만 몸을 좀 볼 수 있는가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좀 불쾌하였다. 몸수색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남북간의 대립상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보십시오.』

하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고 절대로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말했다.

『지금 북한 대사관에서 자주 도발을 걸어옵니다. 얼마전에도 몸에 녹음기를 감춰가지고 망명을 신청하는 것처럼 하면서 대사관 관원들의 말을 녹음하여 가지고 러시아측에다 대고 한국에서 북한 사람들을 납치해 간다고 제기하여 러시아측 경찰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시베리아 벌목장 노동자 한 명이 남조선으로 가려고 남조선 대사관에 찾아 왔다가 성공 못하고 서구라파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북조선 대사관에 잡혀갔다. 그는 심문에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북조선 대사관으로 알고 찾아갔는데 들어가 보니 남조선 대사관이었다면서 남조선 대사관에서는 자기를 남조선으로 망명하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에서 겨우 빠져나와 열차를 탔는데 잘못 타서 헝가리 국경까지 가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그를 이용하여 남조선 대사관을 비방 중상하는 데 써먹은 것 같다.
북조선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남조선으로 망명하는 것이다. 북조선 사람들이 탈출하여 러시아에서 사는 것과 남조선으로 가는 것은 그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취급되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벌한다.
그 외에도 최 선생은 여러 가지 실례를 들면서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사람이 없어지면 남조선 대사관 주변에서 감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더러 이름과 생년월일, 간단한 경력을 쓰고 망명하겠다는 전향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름 김 호
생년월일 1959. 7. 21
출생지 양강도 삼지연구 이명수
사는 곳 양강도 보천군 대평구

경력
1966. 9. 1~1975. 8. 31 고등학교 졸업
1975. 9. 4~1985. 11. 24 조선인민군 복무
1985. 12~1988. 4. 1 양강도 보천군 농기계작업소 노동자
1988. 5. 15~1991. 8. 23 재소임업대표부 제8사업소 노동자
1991. 8. 24 탈출

전향서
나는 북조선의 독재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남조선으로 망명할 것을 원하면서 한국 정부에서 받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1991. 9. 7 김 호

내가 다 쓰고 펜을 놓자 그는 여권은 무슨 여권을 가지고 있는 가고 물었다. 나에게는 여권이 없었다. 북조선에서는 도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최 선생 은 자기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여권이 없이는 못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 귀를 의심했다. 여권이 없이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한 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관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가 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아니 그래 갈 수 없습니까?』
『여권이 없이 어떻게 가겠습니까. 다른 서방국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 러시아는 아직 공산권내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외교관계를 맺은지 얼마 안 되지만 북한은 40여년간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자칫 잘못 하여 외교상 문제가 크게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정부는 한 민족으로서 당신과 같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김 선생이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너무 안타까와 또 물었다.

『다른 무슨 방법은 없겠습니까?』
『방법은 이제 당신이 우즈백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가서 살면서 잘하면 소련 여권을 만들 수 있는데 소련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서 초청장을 받아 가지고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출한지 며칠 안되는데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가든가.』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남조선에 못가면 못 갔지 다시 돌아설 사람 같은가.)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좀 어렵기는 하나 당신이 헝가리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헝가리와 대단히 관계가 좋으므로 여권 없이도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헝가리로 가는 것도 신통치 못한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면 서도 도와주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고, 비로서 한국에로의 망명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쳐나온 나 자신을 뼈저리게 뉘우쳤다.

어디로 갈 것인가?

대사관을 나선 나는 허탈감으로 하여 머리가 띵하고 도무지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나에게는 갈 데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쎄르게이는 옆에서 보기가 안됐던지 넓고 넓은 소련땅에 살 데는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말고 여관에서 쉬자고 하였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날따라 찾아가는 여관마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온 거리를 헤매며 자리를 찾던 우리는 밤 12시나 되어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여관에서 목욕을 한 다음 식사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침대에 드러누었다. 그러자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꼬냑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속이 답답할 때는 한 잔 하면 좋다고 잡아끌었다. 나는 혼자서 그 한 병을 거의 다 마시다시피 하고 거나하게 취한 김에 정신없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8시경에 일어난 나는 세수를 하고 자리에 드러누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그러자 쎄르게이는 타쉬켄트나 알마티아에 조선인 교포들이 많은데 거기에 가서 좀 살면서 증명서를 해가지고 남조선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고 물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가서 아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살며 여권은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생각하던 끝에 말했다.

『쎄르게이 아무래도 내친 걸음인데 헝가리로 가는 것이 어때.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걸어서 넘으면 되지 않을까?』

쎄르게이는 아무튼 잘 생각해 보고 결심하라고 하며 오늘은 모스크바 구경이나 하고 저녁에 다시 토론하자는 것이다.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크레믈린으로 갔다. 크레믈린 앞거리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파편에 맞은 듯 창유리가 깨지고 타이어가 터지고 충돌하여 찌그러진 승용차들과 대형 짐차들 이 거리에 꽉 차있고 바리케이트를 쌓았던 자리들로 하여 엉망진창이다. 나는 쎄르게이에게 여기가 왜 이렇게 지저분한가고 묻자 여기가 바로 지난 8월 쿠데타가 일어났던 자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새로운 기분으로 그 자리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때 공산당 집권자들이 승리하였다면 세계 정세가 어떻게 변했을까?) 크레믈린을 다 돌아 본 다음 우리는 레닌사적관, 백화점까지 다 돌아보고 여관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아침 나는 헝가리로 가려고 모스크바의 키예브쓰카야 역으로 나왔다. 그때 우리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모스크바-부다페스트행 열차를 타고 키예브까지 가면서 국경 통과 질서를 알아보고 열차에 몸을 숨겨 가지고 국경을 통과할 수 있으면 열차원을 돈으로 매수한다. 다음은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산을 외돌아 걸어서 넘으면 되는데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것은 자신이 있었지만 넘어선 다음이 문제였다. 국경에서 부다페스트까지 가자면 헝가리 돈이나 달러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4,000루블 밖에 없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서 받은 100달러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해결 방도가 서지 않았다.
무작정 열차에 올라탄 우리는 열차원을 만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탄 방통은 헝가리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부터 3방통 만이 헝가리로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쎄르게이가 자기 혼자서 헝가리행 방통에 가보겠다며 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와서 안될 것 같다고 머리를 저었다. 열차원은 쎄르게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왜 증명서가 없는가고 오히려 따지려는 것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일은 자꾸만 꼬이기만 했다.
어쩌면 좋은가. 어디로 갈까. 헝가리 국경을 넘다가 잡히면 끝이야. 그렇다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에 가면 누가 여권도 없는 사람을 믿고 도와주겠는가. 생각할수록 기막힌 노릇이었다.
되든 안되든, 죽든 살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 밖에 더 갈데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음날 아침 키에브에서 내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나는 타슈켄트에 가 보기로 결심하고 열차 시간을 알아보니 다음날 아침 7시에 열차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표를 사고 역에서 자기로 했다.

쎄르게이의 우정

역에서 기다리노라니 또다시 머리가 복잡했다. 이젠 날짜도 퍽 지났음으로 쎄르게이는 빨리 돌아가야 했고, 나는 혼자서 행동해야 했다. 쎄르게이는 내 앞길을 두고 자꾸 걱정하면서 뭐든지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를 썼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 없어. 괜찮아. 젊은놈이 아무렴 제구실을 못할까. 내 이제 타슈켄트에 가서 기어이 성공하고야 말겠어.』
『꼭 성공하라구. 그리고 조심해야 해. 자네 잡히기만 하면 끝이야. 타슈켄트에 갔다가 정 바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전보를 보내라고.』

그는 주소를 적어주고 아침이면 헤어지겠는데 다시 못 만날지 모르니 헤어지기 전에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면 카페로 이끌었다. 그런데 밤 12시경에 김일성의 초상 휘장을 단 사람 몇 명이 카페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극도로 긴장하여 눈짓으로 쎄르게이더러 밖으로 나가자고 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한참 후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들도 역시 대합실에서 밤을 새울 작정인지 오래도록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일어설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생각할수록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제 사람들을 무서워 피해다니며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밤을 새우자니 한심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