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 생활(하) – 홍순옥

나의 북한 생활(하)

홍순옥 (탈북여성)

농장원의 생활

2001년에는 농사가 잘 아니 되었습니다. 어째 농사가 잘 안되었는가 하면 청진이라는 곳은 동해 바다를 꼈기 때문에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안개가 계속 끼어서 날씨가 완전히 변덕스럽습니다. 그런데 60 년 이래로 처음으로 오는 현상으로 60일 동안을 해를 못봤기 때문에 벼 모를 꼽아놨는데 한달이 되도 벼 모살이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농사가 너무 안되서 식량타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는 다른데는 모르겠는데 어랑에 송이가 좀 난다 해서 송이 뜯으려고 세명이 같이 우리 사돈 집에 갔습니다. 웃방에 들어가 보니까 콩 껍데기를 가득 내놓고 그 다음에 옥수수 붓고 송치 가득합니다. 그래 ‘어째 불 때는데 이 구들에다 놨는가?’하니까 그게 농장원들의 식량이랍니다. 그래 이거 어떻게 먹겠는가 하니까 그거 제분내서 강냉이가루 조금 섞어서 먹는데 전기 없어서 제분기가 돌아 못가기 때문에 그거 지금 가루 못내서 그럽니다. 강냉이를 그냥 망에다 갈아서 그 껍데기고, 가루고, 쫌 짜게(쪼개져) 있는게고 이렇게 막 죽을 써서 주는데, 소금도 없어서 우리만 그 위에다 소금을 조금 놔주고 저네는 소금도 없이 그렇게 먹습니다. 먹자고 보니까 입에 그 강냉이 껍질이 가득 끼워서 민에(전혀) 껄껄하며 넘어 안갑니다.

그래 그런 것도 한사발씩 안주고 반사발씩이나 되게 주는거 먹고서 왔습니다. 우리 갔을 때가 가을이었는데 농장원들이 그렇게 먹고 어떻게 농장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농장원들이 강냉이나 감자나 조금 달릴(열릴) 때부터 먹고 당장 살아야 되겠으니까 자꾸 도둑질 해갑니다. 한이삭 두이삭씩 옆구리에다 넣고, 구루마에다 넣고 이래서는 그것을 가지고 망에다 갈아먹고 이렇게 타격받다 보니까 농장원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농사는 되겠으면 되고 말겠으면 말고 어쨌든 나무라도 해서 팔아야 먹고 살고, 풀이래도 캐야 먹고 살겠으니까 순간 순간 살기 위해서 애를 쓰지 그 농사를 잘 지어야 되겠다는데 신경을 덜 씁니다.

아무리 농사를 애를 쓰고 했다 해도 소채(채소) 하나를 봐도 그렇습니다. 소채밭에다 길을 빼느라고(내느라고) 숱한 것 뜯어놓고 밭을 다 못쓰게 만들었고, 양어장 짓느라고 못쓰게 만들었지. 6월말이면 감자를 캡니다. 한창 꽃이 필때, 감자 열릴때 벌써 싹 빼서 먹고 거기다 소채를 심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자도 바로 못먹고 배추도 바로 안되고 그래서 농장원들의 생활이라는 것은 직장원이나 농장원이나 역시 한가집니다.

굶주린 사람들의 모습

우리 인민반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함흥에서 시집왔는데 처녀때 자동차에서 떨어져 다리뼈 끊어져서 다리를 접니다. 그런 아주머니 시집와서 해산했는데, 해산한 첫끼부터 먹을 것이 없어 세끼 굶었답니다. 세끼 굶으니까 눈앞이 노랗게 보이지, 일어나면 막 죽을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세대주가 작업복을 하나 가지고 나가 국수 한키로를 바꿔와서 이 국수 한키로를 가마에 넣고 삶았습니다. 글쎄 국물도 낱알물이라고 거기다 소금을 넣고 퍼주니까 소래로 한소래 되었는데 세대주에게는 먹으라는 소리도 아니하고 제 혼자 다 먹었답니다. 세끼를 굶고보니 정신이 싹 나가서 다 먹고 나니까 세대주가 자기도 굶었는데 먹으란 말 안하고 혼자 먹으니까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아주머니를 바라보는데 그때야 아주머니가 정신이 들었는지 ‘어째 당신은 어째 안잡숴?’하니까 ‘있어야 먹지요.’ 이렇게 되었는데 여전히 그집은 지금도 점심을 못먹습니다.

내가 북에서 나올 때도 우리 인민반에 점심 못먹는 집이 여섯집 있었습니다. 점심이라는 법은 기본 모릅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이라도, 국수라도, 강냉이죽이라도 먹는 것이 거저 다행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이밥을 먹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강냉이밥이라도 어쨌든 두끼라도 배불리만 먹으면 이것이 최고로 생각하고…… 여기는 거저 흔해 빠진게 고긴데, 고기 한키로 사먹자면 180~190원하는데 우리는 명절이면 한키로 아니면 오백그램, 물을 가득 넣고, 무 하나 넣고 삶지 않으면 두부를 넣고 국 끓이는데 그 물렁탕 국에다가 고기를 몇점씩 썰어 넣고 거기도 강냉이밥을 말아먹습니다. 여기서 이밥이면 그렇게 맛있겠습니까? 기차게 맛있습니다. 그것도. 그리고 미역이 또 마른 미역이 세게(많이) 불는다 해서 대개 마른 미역을 사서 썰어 넣고 국수를 조금 뜯어 넣고 국수죽을 쑤는데 퍼지다 보니까 국수인지 죽인지 모르는데 이건 먹기는 좋습니다. 미역도 만만하고 국수죽이니까. 그런데 이것을 여러끼 먹으면 가뜩이나 영양이 딸리는데다가 다리가 막 꼬여서 이쪽 갔다 저쪽 갔다 비틀거리며 걷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장마당에 우리 딸하고 걷는데 앞에 노란 강냉이 가마치(누룽지) 조그만게 떨어졌는데, 그거 주어 먹어야 되겠는데 사람과 마주치니까 못줍고 지나갔습니다. 그 사람 지나간 다음 돌아다보고 그거 가서 다시 주어오며 둘이서 씹어먹으며 걸으면서 ‘희영아, 오늘은 이거 먹으니까 살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너무 배고프니까 염치도 없고, 체면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고, 사람이라는게 정신 상태가 다 희미해집니다.

저도 정말 지금 도둑질 해라면 못합니다. 남의 밭에 들어가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 당장 내일 아침이 먹어야 장마당이래도 나가겠는데 근데 장마당 나가 번다는게 돈이 밑천이 없으니까 외상 받아서 팝니다. 외상 받아서 파는데 어떤 사람은 또 이럽니다. ‘딱 먹어야 되겠는데 배는 고프지 하니까 내일 주겠는데 나를 좀 하나 먼저 주!’ 할 수 없이 하나라도 팔자고 하니까 내일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외상 준단 말입니다. 그래 조금 번 돈을 이 사람을 그 본전을 주고 다음날에 또 받아야지 본전을 주지 않으면 다음날에 주지 않기 때문에 먹을 거는 못사도 본전은 딱딱 쥐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외상 많이 나가는 날에는 먹을 것 사가지고 들어올 것이 없습니다. 그래 하루는 올라오는데 누구네 배추밭에 배추 시퍼런게 가득하지, 저녁은 늦어서 산에 가서 나물 캘 새도 없지, ‘에이, 모르겠다! 들키면 말고. 죽어봐 죽겠나’ 그 배추밭에 들어가 배추를 한창 막 뽑는데 개가 짖어서 와닥닥 뛰어나오다 보니까 옷이 쇠줄에 걸려 쭉 찢어지면서 넘어졌단 말입니다. 그래 그집 세대주한테 붙들렸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나이드신 아주머니가 이래서 되겠는가?’ 그래 사정했지요. 어쩌겠어요? 그러니깐 그 사람이 가지고 가라 해서 가져다 먹었습니다. 한번은 강냉이도 도둑질했습니다. 배고프니까 재간 없습디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나아지니까 누구네 밭에 들어설 궁리도 못하고, 우리는 그것이 이제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야! 세상에 어쩌면 남의 강냉이밭에 들어가고, 남의 밭에 들어서서 그저 염치를 쓰고 내뿐이 아니라 바쁜(힘든) 사람은 이렇게 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외탈북자구호기금을 조성합시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이 재외 탈북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하루는 꽃제비 아이들이 땅바닥에서 국수를 주워먹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네는 다 강냉이 국수인데 국수 사먹다 어떻게 하나 떨구면 땅에 새까만게 묻었던 뭐 관계없이 꽃제비들이 그것 주워 먹는단 말입니다. 내옆에 배를 파는 아저씨가 아주머니는 없고 아를 하나 데리고 있는데 아를 점심 사먹일 형편도 못되고 하니까 하루는 이럽니다. ‘야, 정철아 어쩌겠니. 아버지 너를 점심 못먹이는데 다른 아이들도 저렇게 훔쳐먹는데 너 재간것 훔쳐먹으면 먹고 도둑질해 먹겠으면 먹고 너 마음대로 해라.’ 아가 9살인데 ‘아버지 그래랍니까(그럴까요)?’ ‘응 그래라.’하고 나갔는데 어떤 남자들이 내 매대 옆에서 게를 먹었는데 그 게를 빨다가 속이 시커맣게 좀 상한 것 같으니까 그거 버렸는데 야가 그걸 주워 먹었습니다. 그 게를 주워 먹고 그날 저녁으로 급성식중독이 와서 그 날로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죽은 아이들은 세상 끝이 없고…….

기차를 타고 장사길에 오르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저는 우리 언니와 동복(冬服)을 하는 집에 가서 세개는 외상 받고 두개는 돈주고 다섯개를 가지고 순천으로 갔습니다. 순천 가는데 오직 운수기재라는 것은 기차밖에 없는데 기차라는게 몽땅 안다닙니다. 다 안다니고 딱 두만강-평양, 평양-무산 이 두 차만 다니는데 우리 그 1열차는 평양행인데 못탑니다. 차표도 없고 여행증 검열이 어찌 심하기 때문에 도둑차를 타고 차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차 꼭대기 올라가서 함흥까지 가는데 낮이 돼서 안전원들이 눈을 덩어리로 만들어 올려 뿌리면서 내리라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렸는데 차 꼭대기에서 올라가 타다가 내리니까 어떻게 빈혈이 오는지 서서 걷지도 못하고 거기서 막 번져지니까나 그 안에 사람들이 군대들이 우리를 올려 끌어서 올라갔단 말입니다. 그 창문으로 기어서……. 유리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창문으로 기어서 올라갔는데 한참 가다가 정신이 좀 들어서 말하니까나 우리에게 차 타기 위해서 거짓말로 쓰러졌다고 하면서 이 군대라는게 발길로 허리를 막 찹니다. 그래 너무 기차서 ‘야, 너도 군대냐? 너는 엄마도 없고 부모도 없니? 우리도 너네 같은 자식이 있다.’ 이렇게 하니까 군대들도 똥딸이 올랐는지 마구 내리라고 하면서 그 동복 보따리를 밖에다 내뿌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배낭 걸머메고 승강대에 앉아 가다가 역전에서 서면 또 내리고 그 다음 사람들이 오면 승강대에, 그 승강대도 영 빨라야지 차지하지 늦으면 차지하지도 못합니다. 승강대고 차 꼭대기고 그렇게 하고 사람들이 다닙니다. 역시 지금도 차는 한가지고 그 다음에 차가 유리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때 남조선에서 와서 우리 신포 거기에다 경수로를 놓느라고 뭐 건설하는게 있었습니다. 거기 지나갈 때는 남조선 사람들이 본다고 낮에는 못지나가고 차를 저쪽 먼저 역에다 세워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밤이 되야 어두워서 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챙피스러운 것은 아는지 그렇게 하고 차를 몰고 다닌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차 소리만 듣기지 잘 안보입니다. 불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야 새까만데서 거저 24시간이건 30시간이건 거저 그렇게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둑질해 갈까봐 자기 보따리를 등에다 매고 매고 또 매고 그 다음에 발에다 놓으면 발에도 매고 손에다 감고 끈을 해서 잡아맵니다. 이렇게 살아나가는데 단속이 어떻게 심한지 여행증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으니까 장사도 못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는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지금 장마당에서 움직이는게 다 중국 상품이 들어옵니다. 라진으로 해서 들어오고, 무산으로 해서 들어오고, 회령으로 해서 들어오고, 그래서 돈 있는 사람은 장사를 하자면 할 수는 있는데 돈 없는 사람들은 꿔달래도 안주고 여기는 은행가서 대출이라도 받지만 우리에게는 은행에서 그런 돈은 꿔안줍니다.

소경처럼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

그래서 움직이려고 해도 아무리 머리가 돌고 해도 가진게 없으면 없는 사람들은 나라 탓으로 생각안하고 부모를 원망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못살았기 때문에 대대로 내려오며 이렇게 못산다고 합니다.

배우고 듣고 하는게 오직 장군님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암둔하게 살고, 보고 듣는게 없고 우리는 텔레비도 못봅니다. 1월 1일, 2월 16일 사이로 명절이 다가오면 명절 공급으로 전기를 3일동안을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날만 테레비를 앉아 보지 다른 날에는 텔레비를 볼 궁리도 안하고 방송도 안나왔습니다. 종이 사정과 관련해서 세대주도 기자질 했기 때문에 신문 봤는데 그것도 마지막에는 짤려서 당일군만 딱 신문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못듣기 때문에 그렇게 거저 우리는 속아서 모르고 소경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록음기도 조선중앙방송 하나만 틀어놓고 싹 고정시켜 놓기 때문에 원래 다른 나라 정세에 대해서는 들을래야 들을 수 없고 알래야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길래 텔레비가 있어도 치장으로 있다 뿐입니다. 아이들이 텔레비도 못보고 또한 인민반에 텔레비가 있다 해도 한 50% 정도 있고 아직도 흑백입니다. 천연색 텔레비가 한 인민반에 두집 아니면 서너집이나 있고, 잘 살고 그런 집들, 간부들네 집이나 그 다음에 중국에 친척 있고, 쏘련에서 일하고, 일본에서 귀국자네 집이나 천연색 텔레비가 있지 일반 이런 평백성들 집에는 텔레비 없는 집도 많습니다.

경제가 곤난이 들다보니까 공장은 지금 거저 말이 아니게 몽땅 섰습니다. 그래 우리 사람들이 말하는게 50년도 전쟁시기는 겉이 폭격되고 속은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겉은 살아 있고 속은 싹 썩었답니다. 자재 없지, 원료 없지,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니까나 우리 우둔한 여자들 생각에도 우리나라가 지금 허리 펴고 살자 하면 정말 김정일이 골이 돌아서 마음을 다시 먹고 다른 나라들과 손도 잡고 정말 이래 화평도 하고 이래야 살겠는데 지금 저 상태로 해가지고는 천상가도 늘어날 것 같지 못합니다.거저 애매한 이 조선 사람들만 죽어가지 그런 사람들이 이 죽어가는거 아는줄 압니까? 죽으면 진단을 뭐라고 붙이는지 압니까? ‘다 심장마비요, 고혈압이요.’ 무슨 별명 다 붙입니다. 거기다 무슨 식량 곤난으로 영양실조 했다면 그 사람은 그날로 모가지 떨어지기 때문에 의사들도 원래 그렇게 붙이지도 않습니다. 우리 세대주도 뇌출혈로 거짓말 진단을 그렇게 받았습니다. 억울한 것 알지만 그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청진에서 소금밭 만들기

청진에서 수많은 노력을 동원해서 소금밭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동원되는 사람들에게는 배급을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자들은 동원을 무조건 다 나갑니다. 자기 입 하나라도 살자고…….

아주머니들 자체가 원래 동원이 있다면 ‘거기를 나가시오.’ 일은 심하지만 그 세대주 한 일이라도 더느라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을 가서 소금밭을 만들었는데 작년(2001년)에 장군님 거기 현지지도 온다 해서 그것도 우리 인민반 사람이 거기 갔다 페라그라가 와서 집에 왔는데 소금밭에 대해 그 사람보고 물어봤습니다. 장군님이 온다니까나 소금을 다섯톤 가져다가 세개 블럭크에다 깔았는데 그거 건조시키고 보니까나 500키로 나왔답니다. 생산하는게 리익을 보자고 생산하는게 아니라 깍깍지 하느라고 다섯톤을 물에다 넣어서 500키로를 생산했답니다. 그렇게 하고 허위 보고를 해서 소금 생산한다고 하니까나 그걸 곧이듣고 함경북도에서는 자체로 소금을 생산해도 함경북도 주민들이 다 먹고 나머지를 량강도에까지 풀겠다고 하니 아주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만족합니다. 도당책임비서 이름이 리근모인데 우리 사람들이 말근모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말밖에 없고 실천이 없기 때문에 말근모, 말근모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 하나 인사를 받고, 표창을 받고, 감사를 받자고 다섯톤 소금을 넣고 500키로를 생산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고생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소금밭이 완공 못돼서 다시 한다고 했습니다. 소금물이 자꾸 새서 내려가기 때문에 소금을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근데 어째서 소금물이 내려가는가. 블럭크를 만든 다음에는 진흙다짐을 해가지고 거기다 세멘트로 공골이를 해야 되겠는데 그 세멘트가 없으니까나 감탕을 안에다 넣고 우에다가 진흙으로 다져넣습니다. 아무리 다져넣은들 물은 그냥 거기 차있으니가 그냥 틈새서 샙니다. 저도 인민반장을 했지만 우리 동네까지 그 분공이 들어서 한 인민반에서 세명씩 대표로 그 동원에 나갔었는데 그 동원 나가면 인민반에서 걷어서 그 가족하고 그 나간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래 나갔었는데 그 진흙을 깔아놓은 것 몽땅 다시 걷어냈답니다. 걷어내고 감탕을 거기다 50센치를 더 깔고 진흙을 다시 깐답니다. 그래서 소금 생산되는 것 저는 못봤습니다.

그리고 양어장을 또 꾸렸는데 청진에 바다도, 제 바다에 있는 고기도 기름이 없어 못잡아먹는데 양어장을 그 소채밭에 형편없이 많이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양어장이 물을 어디 것을 했는가면 화력발전소 퇴수물을 거기다 집어넣는데 거기 고기 됩니까? 그래서 비판 말씀을 받았단 말입니다. 함경북도 바다가 삼면으로 끼고 있는데 바다를 뜯어먹지 않고 고기를 길러서 먹겠다고 하니 골을 잘못 썼다고 비판말씀을 받고 그 양어장을 또 제뿌렸습니다. 근데 파낼 때는 모다들어 파냈는데 이걸 밭을 다시 만들자면 판거 다시 메어야 하는데 메우지 않고 그냥 놓다나니까 농사도 못짓고 고기도 못기르고 수많은 노력만 3달동안 우리 거기 동원되었습니다. 우리는 동원이라는 것 가정 부인들이 안다닌 데 없습니다. 여름에는 농촌 동원, 겨울에는 발전소 동원, 먹지도 못하는 양어장 동원, 불을 본대서 발전도 동원은 한 반년을 다녔습니다. 거기에다 천막을 쳐놓고 있으면서…… 그런데 발전소 불은 커녕 여전히 불은 점점 더 안오고 고생은 더하면서 발전소는 지어놓기는 많이 지었는데 실시 못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제대 군인들이 직장에 넣자니까 다 직장문들이 닫고 하니까나 염소 밭을 만들었는데 산간지대에서 거기다 염소 밭을 만들었습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염소 우사를 짓고, 거기 관리원들의 집도 짓고 했는데 염소를 기르자니까 염소 있습니까? 흉년철에 다 팔아 먹다나니까 염소 새끼 없습니다. 그래서 로동자 다섯명당 염소 한마리씩 사내라. 그래서 기업소 별로 분공이 떨어졌는데 로동자들이 목을 매끌어도 듣습니까?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고 돈이 없는데, 그러면 우리를 줄 돈에서 염소를 사넣어라. 이렇게 나옵니다. 재간이 없지요. 돈도 주지 않으면서 염소를 사내라니까 사낼 수도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염소 밭을 꾸려놓고 작년에 한마리도 염소 없어 운영 못했습니다.

꽃제비 수용소에서

그런데 집 지어놓은 것 자꾸 뜯어가서 그 꽃제비 아이들을 조금 큰 아이들을, 나이 먹은 아이들을 기업소 별로 한두명씩 배급을 주어가며 갸네를 거기 가서 집 지키고 낮에는 너네 나무해서 때고 집 지켜라. 그래서 꽃제비 아이들은 큰 아이들은 거기로 많이 가고 작은 아이들은 거리에 너무 방황하고 돌아다니니까 국가적으로 조치 취한게 꽃제비 수용소를 하나 냈는데 우리네 역전 앞에 해안려관이 4층인데 3층에다 냈습니다. 거기다 꽃제비들은 가두어 넣고 공부도 배워주고 이랬는데, 밖에서는 아이들이 빠른거는 배부르고 빠르지 못한거는 배고프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가두어 넣어 밥 조금씩 주니까 몽땅 배를 고르니까나 아이들이 안되겠다 하고 여기서 굶어죽을 바에는 뛰어내리자.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한다며 3층에서 둘이 뛰어내렸는데 여자아이는 살고 남자아이는 그때 죽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어서 꽃제비 수용소를 어디로 가지고 갔는가하면 농포라는데 있는데 거기로 가지고 가서 따로 거두어 넣고 있는데 밥이라고 준다는게 강냉이 그 짝강냉이 밥을 주는게 거저 조금씩 주니까나 배고파서 아이들이 자꾸 거기서 도망쳐 나옵니다. 그래도 장마당에서 훔쳐먹는 것이 낫다. 이러고 그래서 국가적으로 그렇게 하느라 하는게 바로 되지 않고 어지간한 아이들은 다 죽고 아직도 꽃제비가 있습니다.

남한에서 큰오빠를 만나다

저도 남한에 와서 56년만에 제일 큰오빠와 외삼촌을 만났습니다. 47년도에 헤어졌는데 우리 외가집이 여기다 보니까나 오빠가 여기 와서 공부하면서 우리는 북에 있고 이날 이때까지 소식 한장 없으니까 우리는 죽었는줄 알았습니다. 그래 저는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오빠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가 남한에 오자마자 그런 말하였더니 오빠를 찾아주어서 건강한 모습으로 56년만에 오빠를 만났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북한 형제들에게 빨리 소식 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