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 생활(상) – 홍순옥

나의 북한 생활(상)

홍순옥 (탈북여성)

저는 2002년 8월 5일날 청진을 떠나서, 중국에 8월 7일날 도착해서 8월 28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제 딸이 먼저 한국에 나왔기 때문에 그 딸이 연줄로 해서 손쉽게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탁아소 보육원으로서 21년 동안 일했으며 인민반 생활 17년 동안 했습니다. (인민반) 반장도 했습니다. 8월달에 올 때는 지금 와서 우리 나라 경제 개혁을 실시하는 것까지 조금이나마 보고 왔습니다. 96년도부터는 우리 사람들이 그 배급제도가 완전히 없어졌다시피 하고 1년간 걸쳐서 설하고 2월 16일(김정일 생일), 4월 15일(김일성 생일) 세 명절을 빼고는 국가에서는 식량을 주지 않기 때문에 살아나가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96년도부터는 가정부인들이 일하는 거 다 사직시켜서 ‘밥벌이를 하고 살아라’ 이렇게 해서 세대주들이나 청년들은 일하고 가정부인들은 장마당에 나 앉아서 일하게 됐습니다. 우리 나라 경제가 매우 급속히 이렇게 낙후해짐에 따라 공장, 기업소가 다 문 닫게 되고 세대주들이 일하러 나가도 배급도 타지 못하지, 노임이라는게 기본 없어지게 되자 그때까지만 해도 지원이라는 건 별로 없었지, 살아나간다는 게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사람들은 그때부터 죽기 시작해서 99년도 초반까지 그렇게 죽었는데 맨 세게 죽기는 96년, 97년, 98년 3년 동안 막 그저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죽다 시피해서 사람으로서 눈뜨고 볼 수 없이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다 평양에 있는 높은 간부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리 사회주의 제도라 해도 식량이 점점 없으니까 그런지, 간부하고 이 노동자 사이가 점점 많아집니다(벌어지거나 격차가 커지는 것을 뜻하는 듯). 우선 당 일꾼이나 보위 일꾼이나 안전 일꾼들은 죽은 게 없습니다. 순 죽었다는 건 고지식하게 딱 로동에만 매달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에서 주는 것만 바라고 살다보니까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죽게 된 원인은 쌀을 주지 않은데 있습니다. 당에서부터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풀로 식량을 대용하랍니다. ‘풀을 뜯어서 거기다가 가루를 한 줌 쥐여서 떡을 해 먹으라’ 하는데 풀도 산에 없습니다. 어찌나 뜯어먹는지. 그리고 심지어 우리 북한 땅이 왜 새빨간 줄 압니까? 석탄이란 건 민에(전혀) 안 쓰고 전기란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부엌에 아궁이에다가 불을 지펴야 밥을 해 먹습니다. 석탄을 1년에 석 단씩 주던 게 한 그람도 안 주니까 산에 가서 검부락지(검불)란 검부락지는 다 끌어오고, 심지어 산에 송기떡을…… 여기 분들은 소나무껍질로 떡을 해 먹었다하면 거짓말이라 할겁니다. 소나무 껍질을 아주 박박 벗기고 그 안에 속껍질을 벗겨서 양잿물에 넣고 삶아서 채로, 돌에다 계속 두드려서 보드랍게 해서 강냉이 가루를 거기다 한 줌 쥐여서 그렇게 해 먹고서리 3년 동안 사는데 사람들이 용케도 1년은 버텨 갑디다.

1년이 지나 다음해부터는 사람의 몰골이라는 게 뼈에다 맨 가죽만 씌워놨으니까……. 조선사람이 왜 새까만 줄 압니까? 어릴 때부터 먹을 거라는 게 없으니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탁아소에 유치원 아이들은 간식이라는 거 모릅니다. 아이들도 어찌 똑똑한지 ‘우리 먹을래’ (같은 말을) 아니 합니다. 그런 거 달라는 소리도 모르고. 지금 아이들이 이밥도 모르고 삽니다. 한국에서 쌀을 많이 보냈다하지만 해도 솔직히 말해서 저는 쌀 한 그람 못 얻어먹고 왔습니다. 유엔에서, 쌀기구에서 강냉이를 많이 줘서 강냉이 배급은 많이 타 먹었는데 여기(한국) 와서 저쪽(북한) 쌀을 줬다는 소릴 들었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7월달에 북한에서 나오기 전에 한국에서 비료를 보내줘서, 동해안 부두로 그 비료가 와서 농장들에서 그 비료 실어들이는 것은 한국에서 왔다는 걸 듣고 왔는데, 쌀은 한 번도 왔다는 소리도 못 듣고 받아먹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전에는 풀을 뜯어먹다 나중엔 사람 먹을 풀이 없어서 돼지풀을 다 뜯어서……. 너무 풀을 먹으니깐 그 풀독이 들어서 사람들이 눈이 다 막 들어붓게 띵띵 붓습니다. 그 송기떡은 낟알가루 조금 섞기 때문에 대변보자면 그 것을 허물면서 젓가락으로 막……. 어떤 사람들은 막 파냅니다. 제가 이 강연을 다른데 가 한번 해봤는데 사람들이 도저히 믿지 않습니다. 굶어서 죽었대도 믿지 않습니다.

저희 세대주(남편)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하고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서 오래 일했지만 (당의) 배려가 다 떨어지고 배급이 없으니까 기자도 쓸데없고 대학을 졸업해도 쓸데없고, 97년 5월달에 굶어죽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데 26살에, 26살 아까운 나이에……. 난 아들 하나밖에 없는 거 땅에 묻고 왔습니다. 저희 딸은 중국에서 불잡혀 나왔다가 내가 사는 꼴을 보고 ‘어머니! 우린 여태까지 속아서 이렇게 사는데, 중국으로 갑시다’ 하는 걸, 나는 중국으로 가면, ‘못 가겠다. 굶어 죽어도 나는 내 조국에서 죽겠다’ 이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8월 8일날에 딸에게서 기별이 왔는데 ‘어머니 중국까지 기어나오십시오. 내 돈을 좀 보내주겠습니다.’ 그래서 ‘중국이라는데 남들도 가는데 나도 좀 가보자. 돈도 주겠다는데…….’ 그리고 그저 남자를 하나 따라서 중국으로 갔는데, 우리 딸애가 한국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야! 한국이라는 데는 어디야?’ 우리는 남조선이라야 알지 한국이라면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데가) 남조선이랍디다. 나는 ‘얘야, 니 어찌 돌았나? 남조선으로 니 어쩌 가나?’ 그러니까는 ‘어머니, 우리가 생각하던 나라 아닙니다. 여기와야 살지, 어머니 거기서는 안됩니다. 이제라도 어머니, 많지 않은 여생이라도 와서 살다가 죽고, 편안하게 있다가…….’

그래서 난 그 자리에서 (한국으로) 오겠다고 하면, 집에 저 조선에 둘이 있는 딸이 어머니가 두만강 물에 빠져 죽었는지, 어디 갔는지도 알 길이 없지. ‘내가 가서 말하고 오겠다’ 그러니깐 우리 딸이 돈을 중국돈으로 2000원 보내줍디다. 내가 그거 가지고 조선에 다시 건너갔다가 왔습니다. 그래 두 딸한테다가 나눠주고 ‘한국으로 온다’고 하면 걔네 함께 뛸(탈북 할) 것 같아서 ‘중국에 돈 많은 영감있는데, 어쩌겠나? 내라도 거기 가서, 영감(하고) 살고 당장 벌어 너네들 챙겨 주겠다’니 그러나까, 우리 셋째가 뭣이라 하는가 하면 ‘어머니, 나도 그러면 무산쪽으로 가서 시집가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기별도 할 수 있고, 왔다갈 수도 있게.’ 그래 내가 셋째 딸을 무산에다 집을 주고, 5월 25일날 시집보내 주고, 내가 8월 5일날 여기 떠나 왔습니다.

정말 꽃제비라고 불리우는 그 불쌍한 아이들이 먹지 못하고 신도 없고, 양말도 없이 겨울을 나면서 죽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북)는 겨울에 여기처럼 이렇지 않습니다. 눈이 무릎에까지 쌓이고 춥다는 것은 더 말할 수도 없고, 5월달까지 동복(冬服)입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집이 없어 역전에서 자자면, 여기 역전은 뜨뜻하지만은 우리는 역전도 춥습니다. 그리고 역전에서 꽃제비 아들이 무리지어서 자면 자꾸 내 떨구기 때문에 역전앞에 재를 버리는 곳에서, 그 재를 파고 그 재 안에 들어가서 애들이 골(머리)만 딱 비닐 뒤집어쓰고 재를 덮고 잡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꽃제비 아들이 얼굴이 그리 새까맣고, 온 몸이 새까맣습니다. 그런게 발이 얼어서, 심지어 어떤 아들은 발인가 손이 그 끝이 없는 아이들을 장에서 몇을 봤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역전에 좀 손님들 있는데서 장사질 하다가, 나도 까까도 팔고 과자도 팔았습니다. 역전에 갔는데 어떤 손님이 아이들이 너무 배고프다고 손 들이미니까 강냉이 한 봉지 사서 나눠주는데 아홉 살짜리 아이가 다리가 뭉드라져서 걷지는 못하고 무릎팍으로 기며 그거라도 얻어먹겠다고 손을 들고 무릎팍으로 기며 막 울며 나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래 이 손님이 다른 걸 한 봉지를 사서 그 아이를 줍디다. 그래 나도 차마 살기는 막막하지만 그 아이를 보니까는 딱해서 내가 팔던거 하나 주면서리 ‘니는 엄마, 아버지 없니?’ 하고 물으니 다 죽었답니다. 그게 남자아인데 곱긴 엄청 곱습니다. 내가 그래 ‘야, 요런 거 아이 없는 집에 데려다 기르지.’ 이렇게 잘난 아이들이 부모를 잘못 만났는지, 세월을 잘못 만났는지, 어찌 아이들을 이렇게 빨리 말려 죽이는가?

그리고 한참 있는데 구르마에다 뭐 척척 주워 싣길래 ‘무슨 거를 싣는가?’ 보니까 사람 죽은 거. 어른입니다. 여자 하나, 남자 둘을 거기다 구르마에다가 턱턱 싣고, 그거 위에다가 숨이 있어서 눈이 멀뚱멀뚱한 거 싣습니다. 한 두 시간 있으면 죽을 사람, 역전 구멍에서 나오지 못하고 역전 사람들 자기네 치울 일이 걱정이니까 한 군데다가 죽은 거 하고, 산 거 하고……. 근데 그런 사람들은 무덤도 없습니다. 그 누가 구덩이 파서 그거 묻겠소? 무슨 어디 석탄굴인지 어딘지……. 게다가 (어디다가 시체를) 던지는지 그런 것도 있습니다. 이거 목격자나 알지 말로 들어서는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산 같은 데는 너무 죽어서 한 미터 간격으로 무덤이 있습니다. 죽어도 거기 이름표 한 마디도 없습니다. 내가 무산으로 오며 아파트를 올려다보니까 50프로 이상은 집이 문짝 다 뜯어가고, 다 비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중국으로 뛰고(도망가고) 나머지는 다 죽어서 땅바닥에 들어가고……. 집이라는 건 다 허허벌판 어찌 빈 집이 많은지? 그러나 우리는 나서부터 오직 배운다는 게 장군님밖에 모르니까 저주하지도 못하고, 나쁘다는 소리도 못하고, 배고파도 배고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 학교 아이들은 한 50프로 학교 가고 나머지는 못 갑니다. 돈이나 조금 있고 먹는 집 아이들은 가지만 못사는 집 아이들은 못 갑니다. 나무를 해야지 (불을) 때고 살지 않습니까. 열 살이고 아홉 살이고 배낭을 메고 검부락지 같은 것 끌고 한 번은 통근차에서 탄 애들 봤는데 그 쓰레기 옷 입고 배낭에다 나무를 메고 다닙니다. 그래도 애들은 밤에 차가 연착이 되어도 역전에 있으면 노래를 부릅니다. 그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노래를 한단 말입니다. 학교에서도 어지간한 아이들은 학교 못 나옵니다. 단속하면서 다 나오라고 하지만, 지금은 나오란 말도 못합니다. 왜? 선생님도 빵선생있고 떡선생있고 까까선생있고, 이렇게 있습니다. 낮에는 아이들을 배워주고 저녁에 어두우면 역전에 가서 빵이나 떡이나, 까까 같은 것, 사탕 같은 것을 파니까 그렇게 부릅니다. 어떤 선생들은 창피스러워서 수건을 앞에다 푹 쓰고 있습니다. 한날은 한번 단속을 했습니다. 단속하는 애들을 보니 어떤 아주머니를 붙들었는데 그 안전원이 뭐라 하는가? ‘선생님, 제발 좀 가십시오.’ 알고 보니까 제잡니다. ‘제발 좀 가십시오.’ ‘야 동철이! 나는 가면 안된다. 지금 떡집에 외상으로 다 가져왔는데…….’ 이러니까 ‘선생님! 아이들 가져다 먹이고 가십시오.’ 두 세 번 그러니까 이 안전원이 내 것도 뺏지 못했습니다. 그 아주머니를 내보냈는데 내 것 뺐겠습니까? 그래서 나도 그 날은 뺏기지 않고 그냥 나왔는데, 나오며 내 물어봤습니다. “어느 학교 선생이냐?” “해당인민학교 선생이다.” 식구가 넷이랍니다.

우리도 지금 아이를 아니 낳는 추세입니다. 지금 다 하나씩 낳습니다. 왜? 기르지도 못하고 먹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하나씩 낳는데 당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셋씩 낳으랍니다. 누가 그래 낳겠답니까? 다 굶어죽을 판에. 그러다 보니까 작년 여름에 군대 선발하는데 군대 뽑을 인원이 모자라서 가을 초부터는 사회에서 24살까지 뽑는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은 안 뽑았는데 대학생들도 뽑고 군대 연한이 만 11년인데 연한이 줄어들어서 8년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30살에 제대되었는데 28살에 제대되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군대 갈 아이들이 없다고 장마당 나 앉아있는 것도 ‘애가 셋이 된 아주머니들로만 장마당 나온다. 그 외에는 장마당 못 나온다’ 그러니까는 어떻게 되었던간에 장마당에서 장사하려면 아이를 낳으라는 겁니다. 당장 산 사람도 먹을게 없는데 그걸 나서 기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7월 1일부터 정치개혁(경제개혁)을 실시하면서 배급제도는 완전히 없어지고 주지도 않는 로임을 20배를 올려놔서 기차 차비값도 30배나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장사 다니느라 청진으로 오자면 한 정거장 두 정거장 통근차를 타고 다니는데 다 걸어다닙니다. 차는 텅텅 비우고 다니고. 그 차비를 아끼면 한 끼 먹고 살기 때문에…… 아주머니들이 낮에는 장마당에서 장사하고 저녁에는 어둡지만 차를 못 타고, 차를 보내고 걸어다닙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편리하게, 좋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날이 가면 갈수록 고난한 일만 더 앞에 나옵니다. 배급제도가 없어지고 배급제 가격도 장마당 가격보다 2~3원 낮게 가격 정했습니다. 입쌀은 54원이요, 강냉이는 24원이요. 장마당은 그거보다 2~3원 더 비싸고. 그런데 장마당 사람들이 머저리라고 배급제 가격보다 2~3원 올려받고 팔겠습니까? 쌀이 150원이 됐습니다. 쌀이 150원이니까 로임도 못 타는데 글쎄 어떻게 벌어 먹고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우성은 더 하고. 내가 여기(한국) 온 후에 소문에 의하면 북한이 96년도, 97년도 그때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온답니다. 그러니까 내 있을 때 우리 구호가 무엇인가 하면 ‘다시 한 번 강행군 전투에로!’ ‘허리띠 한 코 더 조르기 운동’입니다. 조선 사람 허리는 다 개미허립니다. 계속 조르다 보니까. 여기 사람들은 배나오고 살이 쪄서 몸깎기(다이어트)를 하지만 조선 사람 배 나온 사람 몇이 아니 됩니다.

한 하늘을 이고 한 민족으로서 이렇게 천지 차이로 사니까. 저도 온 가족을 거기다 묻고 제 혼자 살겠다고 여기로 돌아설 때 나도 사람이 아니구나! 제라도 살겠다고 이렇게 물을 건너서 이 머나먼 데를 이렇게 오는 겁니다. 뉘우쳐 볼 때 양심적 가책은 갖고 왔으나 그러지 않으면 죽을 일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왔습니다. 그래 저도 여기 와서 여기 계신 분들처럼 잘 살자고 이제 집 받아 나온 지 이제 두 달이 조금 넘었는데 직장 얻어 들어가야 되겠는데 어째 혈압이 자꾸 올라가면서 몸이 좋지 않아 아직 직장은 못 들어갔는데 열심히 일해서 잘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