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생활 30년 ⑤

[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⑤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재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조선 로동당에 입당하다(속)

1987년 9월.
어려운 후보당 기간이 끝날 무렵에 郡 체육관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설 현장에는 약 70명의 후보당원들이 동원되었는데 각 리(협동농장)마다 한두명씩, 공장과 기업소에서 한명 아니면 없는 곳도 있었다.

건설에 동원된 후보당원들은 질통에다 모래와 자갈을 담아서 어깨에 지고 아래층에서 2층으로 운반하는 일을 했다.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그리고 저녁 7시 30분부터 11시까지 식사시간 외에는 하루종일 그 일을 해야 했다. 말이 그렇지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계속 질통을 메고 아래 위층을 오르내리자니 힘이 들어 저녁 때가 되면 질통을 멘 어깨죽지는 껍질이 벗겨지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힘이 들어 앉아서 좀 쉬려고 하면 조직비서가 어느 틈에 달려와서 닥달을 해댔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집으로 가도 좋다. 약간 힘이 든다고 해서 앉아서 쉬면 어떻게 하는가? 미국놈들과 싸우다가도 힘들다고 앉아 있겠는가? 미제를 족치는 심정으로 앞으로의 전진만이 살 길이 열리고 통일의 그날을 앞당길 수 있다.”

조직비서는 장광설을 늘어놓은 다음 빨리빨리 일을 하라고 등을 떼밀었다.

마침내 두달간의 강제노동이 끝나고 내일은 정당증을 수여한다고 했다. 정당증을 받는 날, 회의실에는 후보당증을 받는 사람들은 왼쪽에, 정당증을 받는 후보당원들은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각자 선서를 한 후 후보당증을 바치고 정당증을 받았다.

내 자리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개도 물어가지 않는 당증 하나를 타기 위해 죽을 고생을 했다는 생각에 서글픈 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강냉이죽에 소금을 먹고 밤 11시까지 일한다는 것은 실로 힘겨운 일이었다.

당증을 얻기 위해서 이렇듯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북한 사회에서 북한 사람들과 어깨를 겨누고 생활하려면 당원이 아니면 사람 취급도 못 받을 뿐 아니라 후대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당원이 되어야 하고, 또 당원이 되어야 더욱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10월 23일.

그 어려운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마침내 나도 조선로동당원이 되었다. 당원증 번호 4255195.

이제부터는 나의 대업을 위해 하나하나 준비해 가면 틀림없이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 힘이 아직도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당증(필자注:정당증은 신주 모시듯 하여 가죽주머니 따위를 구입하여 그 속에 당증을 넣고 끈을 매달아 항상 목에 걸고 다닌다)을 매달고 초급당(필자注:큰 연합기업소의 경우 초급당, 부문당, 세포로 나뉘어 있다. 초급당비서는 전체 기업소를 대표하는 당일꾼이다)에 가서 보고를 하고 작업반으로 돌아왔다.

장군님의 戰士들을 누가 막으랴

1989년 10월 2일.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원이 나를 찾는다고 하기에 공장 당위원회로 갔다. 그는 내 건강은 어떻고 지금 집을 떠나도 괜찮은가 하며 내 신상 문제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나는 선반(旋盤) 일을 하고 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우선 눈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선반은 회전 물체를 계속 보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 하다고 하니 직장을 좀 옮겨 주십시오.”

“좀 생각해 봅시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고 술도 준비해 놓고 郡黨 근로단체비서(필자注:군에서 교육과 보건을 맡는 책임자)와 6과(필자 注:재일 북송 교포나 중국에서 온 중국 조선족 및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부서) 지도원을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 공장의 당비서와 지배인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중앙당지도원이 내 직장을 옮겨 줄 것을 비서와 지배인에게 청을 넣자 그들은 내일 당장 옮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또 郡黨 근로단체비서에게는 건강을 책임져 달라면서 우선 휴양소 같은데 한번 다녀을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고 말을 건네자 그것 역시 알았다면서 곧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나는 일이 일사천리로 잘 풀려 기분도 좋고 해서 밤 11시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

다음날, 당비서가 나더러 로동과에 가서 배치를 받으라고 하여 그곳에 갔더니 오늘부터 전동기공장의 양수기 운전공으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그 곳은 군관(장교) 제대군인들이나 좌급(영관급) 및 장군급들이 제대하고 나서 배치되어 정년퇴직 때까지 한두해 정도 일하는 곳으로, 공장에서는 그곳을 가리켜 ‘휴양소’라고 불렀다.

1989년 12월 31일.

오후부터 하늘이 찌뿌드드한게 눈이 을 것 같았다.

밤일이 있어서 양수장에 갔는데 너무 추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 공장에서 가져온 폐타이어를 도끼로 찍어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폈다. 조금 있으니 방이 더워지긴 했는데 머리가 심하게 아파 왔다. 억지로 참고 잠을 청했다. 얼마를 잤는지 깨어 보니 그동안에 사흘이 경과했다는 것이었다. 정신은 차렸으나 잘 걸을 수가 없었다.

1990년 1월 1일.

설날이라 아침에 차례를 지내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아들을 시켜서 양수장에 가보게 하였다. 아들이 양수장 방문을 열어 보니 내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허겁지겁 집으로 뛰어와 아내에게 알렸고, 그 즉시 아내는 공장에 알려 공장 사람들이 나를 담요에 싸서 등에 업고 집으로 왔다.

나는 일어설 기력도 없어서 아내가 석달 간이나 대소변을 받아냈다. 가스 해독 주사를 맞고 나서야 겨우 회복되었다.

나중에 보니 내 소지품에서 3개월 정도 찼던 신품 일제 세이코 시계가 없어졌다. 아마 설날 아침에 군부대 전사(戰士)들이 물을 달라고 양수장에 왔다가 시체나 다름없이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 손목에서 시계를 빼간 것 같았다.

전동기공장 양수장은 운수대대 양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장에서 양수장까지 수도관을 파묻을 때 논을 파서 연결했었는데, 그 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운수대대가 땅을 파다가 수도관이 지나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수도관을 각 중대별로 모두 연결하여 식당과 돈사, 심지어는 온실에까지도 연결하여 물을 마음대로 쓰고 있었다.

정전이 되거나 해서 물을 주지 않으면 하사관들이 총을 메고 와서 위협을 했다.

“장군님의 전사들이 물을 먹지 못하는데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거야?”

“정전이 되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배전부 소장실로 몰려가 소장의 가슴팍에다 총구를 겨누고는 전기를 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발전소에서 보내지 않는데 어떻게 줍니까? 전기가 들어오면 다른 공장은 안주더라도 양수장만은 별도로 더 주겠소.”

소장의 약속을 받고 나서야 그들은 물러갔다.

북에서는 선군사상(先軍思想)이 온 나라 안에 꽉 차 있다. 어딜 가든 군대가 남의 것을 훔쳐 먹다 들키면 장군님의 전사들이 배고파 먹었는데 그것도 죄인가 하며 덤벼든다.

한번은 단상(單相)이 들어와서 물을 못 보내 준 적이 있었다. 공장에 갔다 오니 군인 세 명이 열쇠를 부수고 들어와서 스위치를 넣고 있었다. 돌아가지도 않는 전동기에 계속 스위치를 넣고 있었으니 전동기선은 모조리 다 타버렸다. 양수장 안이 온통 연기가 꽉 찼는데도 미련한 인민군들은 계속 막대기로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화가 나서 그들을 나무랐다.

“단상이 들어왔는데도 그것을 계속 누르고 있으니 전선이 다 타버리지 않았소?”

“단상이 뭐요?”

“단상도 모른단 말이오? 전동기가 돌아가자면 3개의 전기선이 동시에 와야 하는데 선이 2개만 오고 선 하나는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단상이라고 하는 거요.”

“그런 줄도 모르고 불이 들어오기에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운전공이 없으면 스위치를 누르지 말라고 문을 잠가 놓는 거 아니오.”

무식한 장군님의 전사들 때문에 고장난 30kw 전동기를 수리하는데 10여 일이 걸렸다. 그 동안 군부대에서는 물을 민가에 가서 길어다 먹어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