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생활 30년 ④

나의 북한생활 30년 ④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납북 어민 김대곤과 우재학

1985년 3월 7일.

또 한 차례 중앙당 강습에 참가하게 되었다.
원산역에 내려 송도원 62연락소에 갔더니 1982년도에 참석했던 납북 어민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낯선 얼굴들뿐이었다. 이번에 온 사람들도 역시 사회생활에서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800g 백미밥(쌀밥)은 말할 것도 없고 나오는 음식이란 음식은 모두 핥듯이 먹어치웠다. 그 당시 사회에 있으면 일년 가야 고기 한점 구경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사탕도 과자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우유는 더욱 귀했다. 열흘이 경과할 때까지 그들은 생전 밥 구경도 못한 사람들처럼 먹어댔다.

이번에 온 사람들과 통성명을 해보니 경상도 사람들이 많았다. 포항, 영덕, 방어진 등지에서 피랍되어 온 어민들도 있었다.

방어진에서 온 친구의 이름은 김대곤인데 그가 북에 끌려온 사연은 이러하다.

김대곤이 타고 있는 천대 11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며칠간 묵고 출항을 했다. 배는 제주도 남서쪽으로 4시간 가량 항해를 한 다음 그 곳에서 작업을 했다. 새벽녘에 멀리서 배가 한척 느릿느릿 다가오더니 그배의 선원이 김대곤에게 말을 건넸다.

“아침 반찬감이 없는데 좀 줄 수 없겠소?”

“그래요? 좀 갖다 잡수시구려.”

김대곤이 생선을 건네주려고 천대 11호를 그 배에 나란히 갖다 대자 난데없이 공산군들은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꼼짝 마!”

어민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그물은 바다에 넣고 갑판에 모두 엎드려!”

시키는대로 그물을 바다에 넣고 선장실에 들어가서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데, 총 쥔 놈들은 엎드려 있는 선원들을 내려다보면서 움직이는 기척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새끼, 너 죽고 싶어?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면서 공포를 여러 방 쏘아대는 바람에 선원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여름이라 몹시 더운데다 해질녘까지 죽은듯이 꼼짝도 못하고 엎드린채로 벌벌 떨었던 그 때 그 순간을 회상하면서 김대곤은 눈시울을 적셨다.

굼벵이처럼 느리던 배가 천대11호를 끌고 갈 때는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공해상으로 나간 배는 속력을 내고 달리는데 그 큰배를 끌고 가면서도 족히 20노트는 되어 보였다. 밤 11시경에 순위도 부근 해군기지에 도착한 후에야 선원들은 움직일 수 있었다. 천대11호는 배와 선원들이 몽땅 북에 억류되었다고 했다.

같이 강습을 받았던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았다.

우재학 형제는 배를 타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었다. 형을 찾아온 동생이 바다 구경을 하고 싶다고 성화를 하는 통에 바다에 나온 것이 그만 영원히 고향 갈 길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우재학은 노래를 무척 잘했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강습 온 사람들은 너도 나도 앙코르를 외쳤다. 그러나 지도원에게 매번 북한 소리가 아니고 자본주의 유행가 소리가 짙다고 말을 들었다. 그 형제는 둘 다 처자식이 한국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 그 가족들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이번 강습에는 이론 강습 외에 지형학 훈련이 20시간 정도 들어 있었다. 힘든 훈련도 거의 끝나고 이제 마지막 총화 훈련만이 남아 있었다. 제1지점에 가서 쪽지를 걸어 두고 제2지점 산꼭대기에 숨겨 놓은 지령을 받아서 제3지점에 가서 찾아와 담당 교원(교사)에게 바치면 그것으로 임무는 끝나는 것이었다. 조장이 4명의 조원을 데리고 출발하는데 조장의 판단과 지형학이 서툴면 조원들은 밤새도록 고생을 해야 했다.

나는 정규 간첩 양성소인 정치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조장 임무를 받고 떠났다. 그날 저녁에는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데다 지남침(指南針) 하나와 5만분의 1 지도 한장만 달랑 들고 목적지를 찾아가자니 힘이 무척 들었다. 제1지점과 제2지점은 무사히 찾았다. 다음은 제3지점인데 위치가 산중턱이었다. 옷을 벗어서 비를 가린 다음 전짓불을 켜들고 30분 가량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지도를 재검토한 결과 묘안이 떠올랐다.

즉, 산으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산밑을 따라가면서 철탑만 찾으라고 조원들에게 일러 주었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철탑을 찾았다는 조원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즉시 우리 조는 모두 그곳에 모여 북쪽 모서리를 파고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쪽지를 찾을 수 있었다. 강습소에 돌아오니 시간은 밤 12시 30분. 우리 조는 그날 밤 편안하게 잠을 잤다.

그런데 김장원 조와 다른 조 셋은 지난 밤에 내린 비를 고스란히 맞고 그야말로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 다음날 오전 10시경에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그들은 밤새도록 죽어라고 고생을 했는지 사회 생활하는 사람들이 이걸 배워서 무얼 하겠는가 하며 투정을 했다.

한국군 포로들의 비애

1985년 6월 15일.

납북 어민 강습생들은 청진을 시발점으로 해서 일주일 동안의 마지막 견학 코스에 들어갔다.

청진에서는 답사여관(필자 注:혁명 전적지마다 답사행군대들의 숙소인 답사여관이 있다)에 머물렀다. 청진에서 나흘간은 김일성이 회의한 곳, 잠잔 곳, 심지어는 김일성이 똥 싼 곳까지도 모두 견학했다.

부령의 야금공장도 견학했다. 김일성과 김정숙이 공장에 와서 노동자들에게 “수고했다”고 치하했다는 그 한 마디 말을 듣기 위해 어민 50여 명은 강사가 이끄는대로 꼬뚜레에 꿴 소처럼 이리저리 따라다녀야 했다.

다음은 나진에 갔는데 그곳에도 답사여관이 있었다. 저녁에 나진 시장(市長)이 와서 맥주를 주면서 남조선 어민들을 환영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북에 억류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그 다음날 견학 코스는 웅기항. 그 곳을 ‘선봉’이라고도 하는데 군 전체가 하나의 농장으로 개편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현지지도한 곳을 둘러본 다음 배를 타고 ‘서수라(西水羅:현 나진 선봉시 서수라리에 있는 항구)’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국경 지대에 갔다.

그 곳에서는 젖소 30여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곳 관리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김일성이 현지지도하면서 우유를 많이 생산하여 인민들에게 공급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젖소 30마리에서 우유가 나오면 얼마나 나온다고 인민들에게 골고루 공급하라고 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웅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화성으로 갔다. 화성군이란 예전의 ‘아오지탄광’을 말한다. 아오지탄광은 한국 사람들, 특히 국군 포로들이 제일 많은 곳으로, 북한은 모자라는 노동력을 해결하기 위해 이들을 이 곳에 억류했던 것이다. 이들은 피가 펄펄 끓어오르는 젊은 시절에 김일성의 말 한 마디로 북에 떨어져 청춘과 인생을 다 바쳐 오로지 일만 해왔던 한국의 군인들이다. 지금은 다들 70대 전후가 되어 생의 황혼기를 맞이했지만 아직도 꿈 속에서조차 고향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비통함을 한국 정부는 도대체 알고 있는지.

다음 견학 코스인 새별군(경원군)에 도착하여 김일성 부대가 항일 투쟁시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다는 용당나루터를 견학하고 온성으로 갔다. 이 곳 역시 국군 포로가 많은 곳이다. 온성탄광은 함경북도에서도 규모가 큰 탄광으로, 한국군들은 포로가 되어 이 곳에 끌려와 갖은 시련과 불행 속에서 젊음을 보냈다. 북한 정권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항상 미행하고 감시하면서 일하는 도구로만 써먹을뿐 인간적인 대우는 결코 해주지 않는다.

왕재산(필자 注:북한 최북단에 있는 국경 도시로, 그 곳에 있는 다섯개의 봉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왕재산 혁명박물관, 김일성 동상과 군중상도 견학했다. 이 작품들은 김일성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려고 상당히 공을 들여서 제작했다고 한다. 북한 전역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을 모두 세어 본다면 아마 수백 개도 더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