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생활 30년 ③

나의 북한생활 30년 ③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납북어민에게 주는 TV도 김정일의 허락이 떨어져야

1981년 2월.
중앙당에서 함주군으로 지시가 내려왔다. 강습이 있으니 내게 식량정지 증명서(필자 注:북에서는 장기 여행시 거주지에서 발급하는 이 증명서를 지니고 있어야 타지에서 식량을 배급받을 수 있다)와 약간의 돈, 적위대(필자 注:북한의 대표적 민간 군사 조직인 노농적위대는 1959년 창설되었다. 미혼 여성을 포함해 만 40~60세 노동자, 농민, 사무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방위 업무를 비롯하여 직장과 주요시설 경계, 지역 방어 등의 임무를 맡고 있다) 훈련복 등을 지참하고 원산 송도원 62연락소(필자 注:주로 납북 어민들의 재훈련 장소로 사용된다)로 오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열차를 타고 원산역에 도착하니 납북 어민 출신 몇명과 지도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송도원 62연락소로 갔다. 강습생들이 다 모였는데 둘러 보니 봉산호 선원과 정치학교 졸업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필자 注:봉산호 선원 중 김장원이 정치학교를 졸업했다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다). 강습생은 모두 합해서 50여 명이고, 강원도·경기도·전라도·경상도 등 각도 사투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상당히 서먹서먹했으나, 며칠이 지나자 고향은 어디며 배는 무얼 탔는가 하며 서로 신상 얘기를 나누다 보니 친해지게 되었다.

식사 때 나오는 음식은 일반 주민들 사회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하루 공급량은 백미 800g에 쇠고기, 돼지고기, 물고기(생선), 그리고 여러 종류의 나물이 나왔다. 강습생들은 처음 입소해서는 나오는 음식을 다 먹고 나서도 식당 한쪽에 놓아둔 우유통에서 우유 한 사발을 받아서 소가 뜨물 먹듯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회에서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처럼 걸신들린듯 먹어치울까……. 그렇게들 잘 먹더니 20여 일이 경과하자 밥과 반찬을 조금씩 남기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누런 떡잎 같던 얼굴들도 화색이 돌고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1982년 5월.

약속된 3개월도 어느덧 흘러 이제 열흘만 남겨 둔 어느 날. 강습생 일행은 평양 견학을 가게 되었다. 시내 상점에 가서 쇼핑을 하라고 하면서 두명식 조를 짜 주었다.

평양에서는 인민반 표지(필자 注:이 표지는 명절이나 다른 특별한 때 중앙에서 인민반 반장에게 한 반에 두세 장 정도 내려 보낸다)를 들고 가야 물건을 살 수 있고, 외지에서 온 사람에게는 절대로 물건을 판매하지 않는다. 라이터 돌은 1인당 3~5개씩은 살 수 있다. 모두 구식 휘발유 라이터를 사용하므로 라이터 돌은 필수적이다. 그날 나는 두 차례에 걸쳐 라이터 돌 10개를 구입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평양 견학을 마친 강습생들은 황주군 여관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연락소 초급당비서가 오더니 우리 어민들에게 제기할 사항이 있으면 모두 말하라는 것이었다. 어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아이들이 남의 집에 가서 보는 형편인데 구경가서는 얻어맞고 오니 마음이 아프다면서 텔레비전 한대씩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비서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이 470대 정도가 있어야겠는데 한꺼번에 그 많은 양을 해결할 수 있는지 일단 중앙에 제의서를 올리겠소. 또 한달 생산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보내줄 수는 없고 몇달씩 나누어서 줄텐데 늦어지더라도 참고 기다리면 틀림없이 보내 주리다.”

북에서는 납북 어민들에게 주는 텔레비전도 김정일 허락을 받아야 한다. 대동강텔레비전 공장은 일본,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지에서 모니터만을 수입해서 조립하는 공장이다.

강습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떠나는 날, 원산역 대합실은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납북 어민들이 매일 광산에 출근하는 일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다면서 울기 시작하자, 너나 없이 남쪽에 고향을 두고 온 처지인지라 보고픈 형제며 처자들 생각에 서로를 부여잡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열차를 타고 함주역에 내리려는데 청진, 회령, 부령 등지로 가는 사람들은 우리보고 좋은 지역에 배치되었다면서 부러움을 금지 못했다. 배치된 곳이 문제가 아니고 어디 있든지 고향을 잊지 않고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간다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들에게도, 또 나 자신에게도 거듭거듭 다짐을 주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데 납북 어민들의 고향길은 언제쯤이나 열리려는지 답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웃기는 선물 전달식

1982년 10월.

원산연락소에 갔다온 지도 벌써 5개월이 흘렀다.

텔레비전이 함주 상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갔더니 550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돈을 지불하고 텔레비전을 받아서 집에 가지고 와 설치하느라고 부산을 피우고 있는데 郡黨에서 사람이 와서 텔레비전을 상자째 다시 郡黨으로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상자에 도로 집어 넣어서 郡黨으로 가져갔더니, 그 곳에서는 또 군 문화회관에서 선물 전달식이 있으니 그리로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다시 텔레비전 상자를 들고 郡 문화회관으로 갔다. 회관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郡黨 지도원이 내게 다가와서는 선물 전달식을 할 때 텔레비전을 받고 나서는 즉석에서 ‘수령님의 배려로 텔레비전을 탔는데 남조선에 있을 때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를 오늘날에는 수령님께서 텔레비전을 보내 주셔서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소위 선물 수여식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앞에 나가서 텔레비전을 받아서 옆에다 두고 인사말을 했다.

“상점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텔레비전을 가지고 집으로 가면서 생각해 보니 수령님께서 한 일도 없는 우리에게 큰 사랑으로 텔리비전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날 저녁 郡 문화회관에서는 예술선전대(필자 注:기동예술선전대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경제 선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의 공연이 있었으나 나는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회관을 빠져 나오는데 조직비서가 회의실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조직비서의 얼굴 표정이 심히 못마땅해 보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조직비서에게 껍데기를 벗길만큼 된통 당했다.

이유는 내가 아까 인사말을 하면서 상점에 돈을 지불하고 집으로 갔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령님의 선물을 어찌 돈으로 계산하겠는가 하며 나를 몰아세웠다. 밤 12시까지 비판서를 써다 바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생각 같아서는 당장 텔레비전을 박살내고도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조직비서라는 작자가 또 보고를 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 그냥 넘어갈 놈이 아니기에 치밀어 오르는 분을 겨우 삭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