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생활 30년 ②

나의 북한생활 30년 ②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를텐데 난줄 어떻게 알았소?”
“우리 집에 밤에 찾아올 사람은 오직 당신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초저녁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꿈을 꾸었다고 했다. 큰나무 밑에서 나무를 안고 돌아가는데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나무 위에 앉기에 잡아서 품에 안았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혹시 누가 오지나 않았을가 하던 차에 문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방에 누가 있소?”
“어머니가 누워 계십니다.”
“더운데 밖에서 이야기합시다.”
나는 고목 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가 펼쳐 놓은 가마니 위에 앉아서 우리는 지나간 일이며 둘만의 앞날에 대해 다정스레 얘기를 나누었다. 어찌나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지 그 곳에 도착한지 벌써 2시간이 지나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은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평양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을 몽땅 그녀에게 주고 일년 내로 꼭 돌아와서 결혼식도 하고 행복하게 살자며 우리 둘은 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녀를 남겨둔 채 학교로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최일화 잘 있소. 지금 당신 곁을 떠나지만 꼭 다시 올 것이오”.
만약 당에서 허락하지 않고 산골로 추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와 같이만 있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간리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경. 역에서 내려 학교 쪽으로 뛰어 45분 만에 전날 저녁에 왔던 코스로 해서 정치학교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배낭 속에다 흙과 검불을 가득 채우고 배낭 겉에도 진흙을 바르고, 옷이며 신발도 진흙투성이로 만들어 위장을 했다. 그런 다음 1호 초대소 부근에 가서 어슬렁거렸다. 그때 관리원 아바이가 나를 발견하더니 숨이 턱에 닿을 듯이 뛰어왔다.
“백 선생(필자 주:당시에 나는 이재근이 아닌 백남일로 변성명을 했다). 엊저녁에 어데 갔다 왔시오?”
“아바이, 우리 초대소가 어데요? 밤새도록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는 내 몰골을 보더니 즉시 1호 초대소로 데리고 갔다.
“조장동무, 백선생이 왔습네다.”
관리원이 고함 소리에 방 안에 있던 조원 3명이 튀어 나왔다.
“어데 갔다 오는가?”
“조장동무, 난 지금 머리가 몹시 아프니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좀 누워야겠소.”
그러고는 방에 들어가 흙 묻은 양말도 신은채로 이불을 펴고 누워 버렸다. 아침 식사 벨이 울렸으나 못들은척 그냥 자리에 계속 누워 있었다. 나중에 관리원이 와서 흔들어 깨우며 식사나 하고 누워 있으라고 했으나 먹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오후 3시경, 교장과 당비서가 오더니 회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충 세수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백 선생. 어제 저녁에 어데 갔다가 아침에 돌아왔습네까?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훈련 시간이 되어 대문을 나갈 때까지는 생각나는데 계속 가고 또 가고 밤새도록 끝도 없이 가다가 날이 밝아서 보니 그 곳이 바로 정치학교 남조선혁명박물관 옆이었습니다. 거기서 초대소로 온다고 온 것이 또 길을 헛갈려 왔다갔다 했습니다.”
나의 그럴듯한 대답에 비서와 교장은 귀엣말로 수군거렸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소. 앞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병원에 가서 검진할 필요가 있고……. 에, 또 모두들 건강에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회의는 무사히 종결되었다. 화장실로 가면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감쪽같은 쇼에 다들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역시 정치학교에서 배운대로 써먹었더니.

사랑하는 그녀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다니!

1973년 7월 8일.
북한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한달여가 지났다.
나는 그리운 최일화 앞으로 만리장성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주소를 몰라서 써놓은 편지를 부칠 수가 없었다. 집주소는 황주군인데 어느 리인지 알아놓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어 가슴을 쳤다.
마침 공장 자재와 인수원이 황해제철연합기업소로 출장을 간다고 해서 그를 찾아가서 출장가는 길에 황주군에 들러 이 편지를 꼭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낙을 했다. 한번도 입지 않은 흰 와이셔츠와 돈 50원을 그에게 주면서 신신당부했다.
“주소는 모르는데 황주역에서 내려 사리원 쪽으로 가다 보면 서쪽으로 나가는 철교가 나온다. 그 철교 밑으로 길을 따라 3리를 더 가면 리(협동농장)가 있다. 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5리 정도 가면 독립가옥이 있는데 그 집 옆에 큰 고목이 있다. 그 집에 가서 최일화를 찾아 이 편지를 주면 당신의 임무는 끝이 나고 돌아오면 또 사례하겠다.”

그가 함주에서 돌아오기만을 눈이 가매지도록 기다리는 내게 그는 슬픈 소식만 안겨 주었다. 그는 황해체절소로 가는 길에 최일화의 집부터 먼저 들렀는데 그녀는 없고 늙은 노무만이 빈 집에 덩그러니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소식을 알아볼 길이 없어 부득이 리당 사무실에 찾아 갔더니 리당비서라는 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최일화는 악질 치안대 대장의 딸이라서 우리들의 투쟁 대상이었는데 그 어미가 오늘 내일 하기에 관대히봐서 이 곳에 살게 두었는데도 그 여자는 배은망덕하게 농장 감자를 훔쳤을 뿐 아니라 유언비어로 인심을 혼라스럽게 했고, 특히 김일성 가계(家系)에 대해 말이 많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 버렸다.”

그녀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다니!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정치범 수용소는 살아 들어가서 시체가 되어야만 나올 수 있는 곳이라는데…….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나고, 마지막엔 영원히 이별을 하는 것이 인생의 철칙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수용소에 끌려가다니! 이제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었구나.
그녀 생각에 가슴 저 밑에서부터 울음이 터져 나오고, 그녀와의 짧았던 기억들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당장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취하지도 않았다. 그 충격 때문에 도저히 근무를 할 수가 없어서 직장에 14일간의 휴가를 내고 휴가기간 내내 술독에 빠져 보냈다. 휴가가 하루밖에 남지 않은 어느날이었다.

아침 일찍 공장 당위원회에서 나를 찾는다고 연락이 와서 갔더니 군당 조직비서에게 가라는 것이었다. 함주군에서 조직비서면 두번째로 권력이 센 사람이다. 조직비서실에 도착해서 전동기공장에서 왔다고 보고를 했다.

“동무가 그 동무요? 어서 오시오. 요즘은 어떻게 지냅니까?”
“그럭저럭 지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내 보고를 받아서 아는데 최일화 때문이지요?”
“그 영향도 다소 있다고 봐야겠지요.”
“사람은 젊은 시절에 배우자를 잘 만나야지,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평생 후회를 하고 혁명 대열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니 잘 알아서 하시오.”
그는 위협 반 회유 반으로 말했다.
“그녀가 지금 황주에 있다면 혁명 대열에서 밀려나도 좋으니 꼭 그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그는 책상을 치면서 청사가 떠나갈듯이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저 사람은 반동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저런 자를 입당시키겠는가? 중앙당의 의견도 있고 하여 입당시키고자 했는데 싹수가 노란 놈이군.”
지도원들이 내 옆에 와서 계속 조직비서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권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빌란 말입니까? 잘못한게 없으니 이제 가겠소.”
“뭐라고? 내가 함주군에 있는한 너 같은 놈은 절대로 입당할 수 없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조직비서는 어쩔 줄을 몰라 발을 구르고 난리법석을 부렸다.
후일 중앙당에서 입당 폰트를 내려 주어도 끝끝내 그는 나를 입당시켜 주지 않았다. 그는 함주에 온지 15년만에 다른 군의 군당 책임비서가 되어 자리를 옮겨 갔으며, 그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나도 당에 입당할 수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