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생활 ①

나의 북한생활 ①

다음은 지난 7월 13일 통일교육원에서 열린 본회 주최 제3회 탈북동포돕기 대학(원)생 자원봉사자 수련회에서 행한 이미영씨의 증언 녹취록이다.

이 미 영
(탈북자·2000년 5월 남한 입국)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미영이구요, 1964년 3월 9일 생입니다. 고향은 평양시 ○○○에서 출생을 하였고, ○○의학대학 7년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제○○ ○○지도부 가족진료소에서 의사로 6년간 일하였습니다. 저는 1999년 1월 북한을 탈북해서 2000년 5월 19일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대한민국의 품으로 귀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데 대해서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럼 제가 북한을 탈북하게 된 그 탈북동기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는 북한이 1인 독재체제와 수령절대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사회전반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해서 지배되는 그런 독재사회가 싫어서 북한을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이라는 사회는 오직 김일성, 김정일이 부자에 의해서 지배되는 폐쇄적인 독재사회인 곳입니다. 북한은 사람도 땅도 심지어 공기마저도 다 한 사람의 것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 가족은 북한에서도 중류급에 속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조선인민군 ○○○에서 ○○로 일하시었고 저희 어머니는 예술영화 촬영소 ○○○단에서 연주가로 일하던 중 평양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저희 삼촌이 갑자기 정치범으로 체포되자 저희 아버지는 군복을 벗고 우리 온 가족은 평양에서부터 머나먼 함경북도 명천군이란 곳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 저는 북한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세계관이 형성되면서부터 북한이라는 사회가 세상에 둘도 없는 독재사회라는 데 대한 인식을 깊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남한에 온 것은 생활이 곤란해서 온 것도 아니고 또 그 사회에서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피난해 온 것도 아니에요. 저희 남편도 ○○부대에서 후군부문(병참)을 담당하고 있어 우리 가족은 북한의 비행사들보다도 더 좋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는 정치적 자유는 정말 추호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회에서 노예적인 생활을 강요당하고 싶지 않아 참된 자유를 찾아서 남한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오늘 강연시간이 한 시간 가량 주어졌기 때문에 제가 이 한 시간 동안에 북한에서 있은 실상에 대해서 어떻게 한 두마디로 여러분에게 다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한 4~50분 가량 강의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에게 질문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북한이 정치적 측면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어요. 북한이 정치체계에 있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마는 정치체계에서 가장 기본을 이루고 있는 수령절대주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수령절대주의란 수령이 절대적인 존재이고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 절대적인 존재이고 수령의 말이라면 국민도 재산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다 초개와 같이 바쳐야 한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수령의 권위가 이렇게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북한에는 자기 가정이나 학교 교실을 비롯한 공공장소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다 모시게 돼 있습니다. 그 초상화 보관을 정중히 하지 못하거나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있는 출판물을 정중히 취급하지 못하게 될 때도 정치범으로 되며 또 남한 방송을 몰래 듣다가 들켜도 정치범으로 되고 또 그의 일가 다시 말하면 김일성이나 김정일 일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여도 그것은 정치범으로 되어 체포당하게 됩니다. 정치범은 3대까지 멸족시키라는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에는 30여만 명이 정치범들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남한에 와서 <쉬리>라는 영화를 보았어요. 여러분은 아마 그것이 그저 영화려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남한에 파견되어 오는 남파공작원들이 마지막 실전훈련대상이 되는 것도 정치범들이며, 북한에서 대량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세균무기의 마지막 생체실험대상이 되는 것도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의 형부가 군의대학을 졸업하고 군진화연구소에서 연구사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출혈열이라는 세균을 여구하였는데 동물실험단계를 거쳐서 인체실험에 들어갔을 때 그 실험액을 주사기에 넣어가지고 정치범들에게 주사를 하였어요. 그날 저의 언니에게 정치범들에게 주사를 할 때 손이 떨리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였답니다.

다음은 제가 한 가지 실례를 더 들겠습니다. 저희 할머니가 평양시 모란봉구역에서 사시었어요. 그 당시 저희 할아버지는 조선인민군 ○○○에서 ○○○로, 말하자며는 김일성의 안중에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그 때 저희 할머니가 눈이 어둡다보니까 로동신문에 실린 그 김일성의 초상화를 분간하지 못하고 그 신문으로 밥상을 덮은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남한처럼 파리를 죽이는 그런 약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여름에 파리가 그 밥상에 자꾸 달라붙고 하니까 로동신문을 덮어놓았습니다. 그때 옆집에서 놀러왔던 한 분이 그 로동신문에 실린 그 김일성의 초상화를 보고 보위부에 신고를 하였어요. 다행히도 할아버지가 인민군 ○○○단에서 ○○○로 있었기 때문에 정치범으론 체포되지 않고 평양에서부터 머나먼 양강도 ○○으로 추방당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북한사람들은 50년간을 첫걸음마를 떼고 아빠 엄마라는 말을 배우면서부터 아버지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완전히 이질화되고 무지몽매해지고 있어요.

제가 경기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갔을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방문을 가셨을 때 평양시민들이 김정일 국방장군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환영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양에서 살 수가 없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눈물을 흘리면서 환영을 하라고 시키지는 않아요.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교양을 너무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텔레비전 화면이나, 직접적으로 이렇게 접할 때는 막 눈물을 흘려요.

제가 평양에서 살 때에 평양 ○○여자중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14세 때 김일성과 김정일 지나가고, 그 때 어느 나라 대통령이 오셨댔어요. 그 때 모란봉 그 언덕에서 연도환영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진달래 가지를 들고 진달래꽃을 흔들면서 환영행사에 참가했는데 행사가 있기 2시간 전부터 훈련을 했어요. 땅에서 30센티 발을 떼라고는 합니다. 발을 떼고 30센티 발을 떼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만세 부르는 훈련을 하거든요. 하지만 눈물을 흘리라고 그렇게 이야기는 안해요. 그런데 연습을 할 때는 눈물이 나지 않던 것이 직접 김일성이 지나가자 환호성 같은 그런 만세 폭풍 소리가 나고 저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어요. "만세"하면서 막 우니까 그 김일성이 천천히 지나가요, 그 때 어린이들은 모란봉 언덕 한쪽에서 진달래 가지를 들고 서 있었어요. 그때 치마저고리를 입었댔어요. 그리고 일부는 손풍금을 메고 손풍금반주를 하면서 그렇게 아마 연출을 한 것 같애요. 그 때 잠시 한 몇 초 가량 그 차가 서더라구요. 그래가지고 김일성이가 답례를 했는데, 막 눈물을 흘렸어요.

저도 지금 생각하면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 때 당시는 그렇게 막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에도 정말 땅을 치며 북한 사람들이 거의가 다 그렇게 통곡을 했어요. 이것은 50년간의 그런 교육을 받아서 완전히 사람들을 이질화시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은 북한의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의 경제난에 대해 저는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첫째로는 한끼도 변변히 먹기 힘든 식량난과, 둘째로는 추위에 떨고 있는 에너지난, 셋째로는 외화난으로 들 수 있겠습니다. 저는 북한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백성들에게 최소한의 먹을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국제사회의 기본규범이요, 인권의 대전제라고 생각하거든요. 북한주민들이 1년에 필요한 식량은 480만톤입니다. 그런데 북한사람들의 리상은 그리 높지 않아요. 그들은 하루 세 끼 강냉이 밥이라도 떨구지 않고 먹고 또 간장, 된장이라도 정상적으로 공급받아서 먹었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소박한 꿈입니다. 김일성이는 생전에 우리 북한 인민들에게 정말 기와집을 쓰고 이밥에 돼지고기국을 먹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사는 것이 우리 북한인민들이 간절한 소원인데 자기가 그것을 꼭 해결하겠노라고 50년간을 독재해왔지만, 결국은 북한을 거지 나라로 만들고 죽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경제구조적인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나라와 달리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은 생산소유가 개인소유가 아니고 다 국가적인 소유잖아요, 지금 북한에서 농사가 잘 안 되는 것이 한랭전선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물론 그 한랭전선의 영향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겠지마는 기본은 그것이 아닙니다. 실례를 하나 들고 본다면 북한에는 자기 개인 땅이 없어요. 농민들에게 30평씩 개인 터전을 주는 것은 있습니다. 거기다가 뭐 부식물이나 풋강냉이 같은 것은 심어 먹으라고 30평씩의 그런 터전은 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공동으로 함께 심는 그런 농장 터전이에요.

그런데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까지만 하면 정말 열심히 일한 사람이든 건달을 부린 사람이든 공수에 따라 분배는 준다고 하지만, 그 분배몫이 거의 비슷하게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누가 열심을 내서 일을 하겠어요. 한 날 한 시에 심은 작황, 다시 말하면 그 30평씩 준 자기 터전이 그 작황하고 농장밭 작황하고는 너무도 천지 차이입니다. 자기 터전에는 풀한포기 날쌔라 꽃밭처럼 가꾸니까 그 터전이 작황은 잘 되고, 농장밭은 거미새끼칠 정도로 풀이 무성하여도 누구하나 가슴아파하지 않으니 어떻게 농사가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땅이 아니어서 양심을 바쳐서 땅을 일구지 않아서 땅이 거의 다 산성화되었어요.

다음은 제가 병원의 실례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도 일단 출근만 하면 환자를 10명을 받든 30명을 받든 저의 생활비는 고정되 있어요. 제가 북한에서 생활비로 130원을 받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해서 첫 의사로임을 받을 때는 120원이에요. 그리고 이제 급수시험을 치면서 급수에 따라서 생활비가 올라가고 그 연한에 따라 생활비가 올라가거든요. 제일 많이 받는 의사선생님이 180원 정도였습니다. 로동자의 평균 생활비가 한 달에 70~80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물론 탄광에서 채탄이나 굴진을 하는 그런 채탄공이나 굴진공 중에는 300원씩 받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실례거든요. 남한에서 평균 로동자들이 한 100만원을 받는다고 볼 때 북한도 많이 받는 사람도 있잖아요. 하지만 평균을 볼 때 북한은 70~80원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돼지고기 한 킬로에 125원, 130원까지 하거든요. 먹는 기름도 한 병에 110원부터 120원 이상이에요. 설탕 있잖아요, 사탕가루, 그것도 한 킬로에 135원까지 했습니다. 제일 눅을 때에는 한 110원 정도까지 할 때가 있어요. 좀 유치하지만, 그 팬티 있잖아요. 팬티도 중국제인데 국산은 없어요. 그러니까 다 중국산이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는데 그 팬티도 70원, 60원, 제일 싼 것이 50원,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그래서 북한에서 300여만명이 굶어죽고 있는 것이 현 사실입니다. 언젠가 남한에서 수재피해가 있었잖아요. 그 때 북한에서는 같은 한 동포라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통일 전략적인 차원에서 남한에 경제원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우리하고 적대계급인데 우리가 주겠다고 해도 너희가 과연 받겠느냐. 선전용으로 말했는데 뜻밖에도 남한에서는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북한에서는 정말 당황했어요. 그래서 2호창고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전쟁대비물자를 비축해두는 창고입니다. 2호창고를 모조리 털고 국가에서 모조리 털어서 남한에 시멘트를 비롯한 식량과 약품을 보냈잖아요. 그때부터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서 진행한 88올림픽 그것을 방해하려고 비행기 폭파사건이라는 것을 만들었잖아요. 김현희. 여러분도 다 잘 아시죠. 하지만 그것은 실패했어요. 그러자 남한의 88올림픽에 맞대응 조치로서 북한의 경제력으로는 감당치 못하는 제 13차 청년학생 축전이라는 것을 벌려놓았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