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된 죽음의 시련을 넘어서

계속된 죽음의 시련을 넘어서

 

김 혁 · 만 23세
전거리교화소 경험자·북한 청진
입국일자: 2001년 9월 20일

 

저는 1982년 1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때는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쌀밥은 먹는 편이었고, 죽을 먹거나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인정이 많았고, 이웃이 힘들 때면 서로 돕는 미덕이 있었으며,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4살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12살 때였던 1995년 함경북도 청진역 앞에서 굶어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저는 3년 동안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16살에 나왔습니다. 제가 지금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함경북도의 한 고아원에 있을 때의 이야기들입니다. 고아원에 갔을 때 저는 인민학교 4학년이었고, 형은 5학년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부에서 고아원만큼은 꼭 식량은 공급해 주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굶주리기 시작할 때에도 고아원은 그럭저럭 옥수수밥이라도 먹는 정도였습니다.

고아원 생활

하지만 1995년 말부터 1997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시기라 고아원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김정일의 방침으로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결국 고아원에도 불어 닥쳤습니다. 그 때부터 어느 연구원이 개발해 내었다고 하는 벼뿌리와 벼껍데기 가루가 보충식량으로 들어와 옥수수 7할에 벼껍데기 가루 3할의 비율로 섞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고아원에는 영양실조로 한 명, 두 명씩 아이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였고, 열병․폐결핵․장티푸스․파라티푸스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1996년부터 1997년 사이에만 총 76명 가운데 무려 23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열병이나 폐결핵에 걸려 죽었습니다. 물론 모두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습니다. 일반사회 역시 마찬가지여서 폐결핵, 옴, 열병 등으로 여기 저기 죽어 나갔습니다.

그 때 고아원에서 제가 돌봐주던 어린아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저는 나이도 있었고, 상급생이었기 때문에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들은 잘 봐주곤 하였는데, 결국 제가 돌봐주던 그 아이도 죽고 말았습니다. 먹는 밥이 겨껍데기 가루이다 보니 먹으면 변비에 걸릴 수밖에 없었고, 수업시간에도 밭에 나가 콩 이삭을 주웠고, 한 줌 되는 콩을 들고 와서 난로 불에 한 알씩 닦아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삭줍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식량난 때문에 일반인들도 모두 밭에 가서 이삭줍기를 하기 때문에 온종일 주워봐야 석 줌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나마 나이가 조금 있고 어느 정도 눈이 돌아가는 아이들은 장마당에 나가 음식을 훔쳐 먹거나, 소매치기를 해서 장마당에서 사 먹었습니다. 그런 생활에 적응한 아이들은 아예 고아원을 뛰쳐나가서 방랑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저 또한 1996년 초에 청진시내에 나가 꽃제비 생활을 한 적 있었습니다. 당시 청진역에 나가면 정말 시체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시체인지 알 수 없지만 어제 누워 있던 사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으면 십중팔구 죽은 시체였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 때 저는 고아원 전교생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열병을 앓았습니다. 열병을 앓으면 일단 입맛을 잃어버리며 꿈이 현실 같이 느껴집니다. 입안에 소금을 한줌이나 넣어도 짠 맛을 느낄 수 없고, 오직 사탕과 같은 당분으로만 입맛이 날 뿐입니다. 아마도 제가 전교생 중에서 가장 늦게 열병에 걸린 것은 다른 학생들보다 심부름을 많이 하고 음식을 잘 얻어먹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고아원 선생님 집에 땔감(통나무)을 한 달구지씩 해주거나, 장작을 패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고아원 내에서 힘이 좋고 나무도 잘하고 하여, 땔감을 자주 시켜 주었고 그 집에서 밥도 얻어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선생님들과의 사이가 좋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건강상태가 좋았고, 열병도 가장 마지막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열병에 걸리자 선생님들이 맛있는 음식을 해주기도 하였지만 먹을 수 없었습니다. 입맛이 없는데다 항상 열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석 달 동안 사탕 몇 알로 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꿈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꿈에 형이 나타나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러 가자고 하면서, 산을 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새벽에야 그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꿈이 너무나 현실처럼 느껴져서 저는 힘도 없는 다리를 이끌고 병실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저 멀리서 형의 목소리가 들리자, 저는 ‘형! 같이가’ 소리쳤고, 형은 저에게 빨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의 목소리는 환청이었고, 그 또한 꿈이었습니다. 저는 급기야 야산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는데, 다행히 이 모습을 발견한 고아원 직원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 시간 고아원에서는 제가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그 후 저는 폐결핵, 폐렴 진단까지 받았지만, 약 한 알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정말 기적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9살 때 공개처형 목격

그때는 청진 시내나 청진 북쪽 지역에서 공개처형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총소리를 울려야 하겠습니다” 라는 김정일의 교시가 국가보위부에서 사회안전부로 넘겨졌고, 중국으로 넘나든 사람들은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중국을 세 번이나 오갔던 제 친구의 할머니와 삼촌이 청진 시내로 끌려가 사형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제가 처음으로 공개처형을 목격한 것은 9살 때였습니다. 그 때 사형 당한 두 명은 형제였습니다. 사형장소는 청진시 수남 구역과 송평 구역을 연결하는 수성천 다리 옆이었습니다. 당시는 겨울이었고 날씨도 무척 추웠습니다. 두 형제는 한 할머니를 과일칼로 찔러 돈을 훔쳤다는 혐의로 한날한시에 총살 되었습니다. 시체가 치워진 뒤, 철없고 어렸던 저와 제 친구는 말뚝에 박혀 있던 총알을 뽑아 갖고 놀았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청진에서도 수남장마당, 청암장마당, 송평장마당, 라남장마당 등 여러 곳에서 공개처형이 집행되었고, 대부분 제철소에서 원동기를 뜯어 그 속에 들어 있는 구리줄을 끊어다 중국에 팔아 버린 혐의가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무궤도 전차의 동선을 잘라서 붙잡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러한 일들이 보편화 되었고, 중국을 넘나드는 사람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대로 앉아서 굶어 죽을 바에는 죄를 짓고서라도 ‘먹다 죽은 귀신’이 되려는 생각에서였던 것입니다. 저는 16세에 감옥에 갔고, 3년형을 선고받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많이 넘긴 뒤 성년이 되어서야 교화소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현실이 제가 북한에서 어린시절을 지내며 보고, 느꼈던 경험이었습니다. 제게는 다시 되새기고 싶지 않은 추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