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탈북
증언자: 김태연(84년생)
2023. 5. 대한민국 입국
편집: 윤영일 <지원팀
매니저>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2023년 5월 30일 한국에 입국한 김태연씨는 북한에서 어려서 전염병(파라티푸스)에 걸려 길에 버려지기도 했고, 길거리를 떠도는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15세에 탈북하게 되었다. 탈북 후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2001년에 강제 북송되었고 그해 다시
탈북했다. 2019년 12월 말, 대한변협에서 김영자 국장을 초청해 북한난민실태를 나누는 자리에서 김태연씨의 구출을 요청, 2020년 1월부터 구출을 시작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구출이 어려워 팬데믹이 끝난 2023년 5월 다시 구출을 시작해 태국을 거쳐 25년 만에 자유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저의 고향은 평안남도 순천시이지만 유치원부터 함경북도 온성군 온탄구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1살 때 입양되어 양부모님과 함께 생활했다. 어릴
때부터 웃음기가 없이 항상 우울하게 지냈으며,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저는 마음속에 불평이
너무 많았습니다. 1996년도에 저의 부모님이 농촌으로 가게 되어서 온성군 동포리로 이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며 보니, 다들 생활이 어려워서 학교에 나오는 학생들이 5~7명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다 전염병(파라티푸스)에 걸려서 학교에 나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허약에 걸렸습니다. 그런 저를 부모님은 생활이 어렵다 보니 장사도 해야 해서 저를 길에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꽃제비 생활을 하게 됐고 생활이 어렵다 보니 구호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때가 14살쯤이었습니다. 구호소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병이 심한 어린이도 있었지만 치료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냥 죽기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는 수두에 감염되었고 하루하루 살이 썩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정말
너무너무 고통스러웠고 치료도 받을 수 없으니 그냥 죽기만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구호소를 나와 온성 구호소로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온성 구호소에서는 저에게 간단한 치료를 해주었고 그
안에서 조그마한 상처들은 나았으나 큰 상처는 계속 심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가 저를 찾으러
구호소에 와서 다시 부모님과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도 없이 매일 밖에서 비닐박막을 깔고
집처럼 자야 하는 그런 생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온성에 있는 작은 고모를 찾아가 도움을 받으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철길을 따라서 온성으로 가는 도중에 힘들어 앉아서 쉬다가 맞은편에 있는 중국을 보게 되었습니다. 날이 아직 어둡지도 않았는데 그쪽은 각 곳에 불빛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때
불쑥 떠오른 것이 구호소에 있을 때 도강했던 애들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중국에
가봤더니 거기에 있는 짐승도 다 입쌀밥과 밀가루 빵을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맞은 편의 불빛을 보니 호기심이 생겼고 그래서 저는 중국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도 가고
싶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당원이다 보니 두려워서 선뜻 나서지 않았지만, 저와 어머니가 도강하겠다니 아버지도
할 수 없이 같이 도강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날 저녁 두만강을 건너 마패쪽으로 탈북하여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1998년 5월 1일이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는 날이죠.
아는 사람도 없이 그냥 강을 건넜는데, 강을 넘자마자 그곳에 나와 있던 교회 전도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가족에게 밥도 먹여 주었고 옷도 새것으로 다 바꿔 입히고 따듯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상처가 계속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전도사님도 방법이 없어 캐나다 어느 목사님에게 연락해서 외국에서
약을 가져다가 치료받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어느 농사짓는 기독교인의 집에서 농사일하며 먹고 살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이름 모를 병이 나서 또 교회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치료받아도 나을 수가 없고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집에서는 저희보고 나가라고 했고 저희는 갈 곳이 없지만 그 집을 나와
산으로 올라탔고, 산에서 방목하는 조선족을 만났습니다. 저희보고
갈 데도 없는데 자기 집 목장에 가서 살면 어떻겠냐고 해서 그 집에 머물렀고, 아버지는 소 방목하고
저는 염소 방목을 하며 어머니를 간호하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염소젖을 마시면서 건강이 점점 회복되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조그마한
삼각으로 된 초막을 짓고 생활하다 아버지가 땅굴집을 짓고 점점 나은 생활을 하게되었습니다. 그 집에서의
생활은 돈을 받고 일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밥만 먹으며 일해주는 것이다 보니 돈을 벌기 위해 저는 그곳을 나와 교회를 찾아갔고, 부모님들은 그곳에서 그냥 일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인도하에 저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는 온전히 시내에서 떳떳하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또다시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많은 사람을 잡아서 북송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저는 거기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이 저보고 심양에 가서 신앙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서, 심양으로 갔고, 심양에서 일 년 후에 다시
도문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도문 석현에서 중국 사람 집에서 일하고 있었고 저도 거기서 잠시 머물렀는데 그 기간에 우리 가족이 다 잡혀서 북송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눈앞이 깜깜했어요. 북송돼서 고통받을 일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서웠고 두려움에 떨렸습니다.
우리는 교회 믿는다는 것을 속이고 도강한 시간도 줄여서 그나마 잡혀있는 시간이 짧았습니다. 처음으로
온성보위부에 들어갔는데 많은 사람이 그 안에 있었고 모두 다 도강해서 잡혀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개구멍
같은 데로 들어가서 종일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만 했고 앉아서 졸아도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돈을 가져오는데 뺏기지 않겠다고 먹어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생식기에 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위부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어떻게 해서도 그것을 찾아내느라고 별짓을 다 했어요. 사람이
화장실을 가면 심지어 앞에서 지켜보기까지 하고 대변을 흩어보라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인간으로서
짐승보다도 못한 지옥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나마 저희는 15일
만에 그곳을 벗어났고 온성 단련대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저희에게 매일 옥수수 뿌리를 뽑는
일과 사람들이 버린 잿더미를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나마 거기 지도원은 조금 인정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하루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났습니다. 다행히 고모의 도움으로 한달만에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고, 고모
집에 며칠 머무르다가 다시 중국으로 도강할 것을 결심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중국으로 가기위해 온종일 걸어야 했고, 산속에서 숨어있으면서 나뭇잎을 이불처럼 덮으면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저녁에 도강했습니다. 그날이 노동절 5월 1일이였습니다.
무사히 도강해서 중국 마패교회에 도착해서 또 전도사님을 통해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위해 시집을 가야 했고, 조선족을 만나 결혼하게 되어 연길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의 시집에서 저에게 용돈 하나
주지를 않았어요. 시누이가 용돈 주고 가면 그것마저도 다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버지는 저를 그 집에서 빼내서 한족 사람에게 소개 해주었습니다. 그나마 조선족
집에서 3년 동안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 한족
사람이 지금의 애 아빠입니다. 그 사람하고 살면서 정말 내가 마지막으로 이 사람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정말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임신이 되면서 숨어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결혼증 없이 임신했기 때문에 저를 데려다가 애를 유산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며칠은 저 집 며칠은 이 집 하면서 숨어다녔는데, 9개월이
되는 날 점점 배가 커지면서 숨어다니지 못하고 집에 있었는데, 저를 잡으러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그때 저는 너무 당황해서 이불장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었고, 그러다
보니 시부모님까지 오셔서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에 시부모님이 돈을 대출받아서 저를 구해냈고 저는
다행히도 잡혀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낳았지만 저는 그 동네 있는 것이 너무 불안했습니다. 애 아빠는 떠나려고 하지 않았지만 제가 나오니 애 아빠도 같이 아들을 데리고 청도로 옮겨 같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큰 시내로 나오니 농촌에 있을 때보다 조금이나마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일하면서 아들을 키웠고 그곳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병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나 갈 수가 없어 가짜로 애 아빠의 신분증을 여자로 만들어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신분이 필요한데 만들 수는 없고 해서 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심양에서 신앙 공부할 때 그 목사님이 저를 한국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때는 나이가 어리다 보니 두려움에 한국 가는 것을 포기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후회가 밀려왔고, 그 목사님을 다시는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가는 선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어 청도에 있는 영사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영사관의 영사에게 전화를 통화했는데 그분이 저보고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오라고 해서 저는 결심하고 영사관을 찾아갔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가짜 신분증을 들고 갔는데 영사관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보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마음이 두근거렸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하지
않고 영사님께 연락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지 자기 힘으로 들어와야만 자기들이 보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울고불고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한국분의 집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집에서 TV를 보다가 이만갑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 보다 보니 그 속에서
연락할 수 있는 이메일이 나오게 되었고 제가 적은 이메일로 연락해 보았지만, 소식이 없었습니다. 또다시 이만갑을 보면서 항상 책과 볼펜을 준비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이만갑에 출연한 박원연 변호사님이 한국에서 탈북민들이 정착하면서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불러줘서 그 순간 연락처를 적었고, 그 연락처를 제가 청소하고 있던 그 집주인에게 주면서 한국 가면 꼭 연락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변호사님과 연락해서 저한테 전화를 주셨고 그분이 저를 위해 수소문하여 북한인권시민연합에 김영자 사무국장님을 연락하여
저를 중국에서 한국으로 나올 수 있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나마 그 조그마한 희망을 갖고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코로나가 생기면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시기 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너무너무 두려웠습니다. 코로나가
생기면서 신분증이 없이 살 수 없는 상태였고 조사가 자꾸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두려움에서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고 한국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삼 년이 지나 드디어
한국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저는 가는 길이 평탄치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영자 국장님은 저보고 성공률이 20%밖에 안 되는데 그래도 한국
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는데 그 순간 저도 두려웠습니다. 가다가 잡히는 날엔 저는 끝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저는 너무나도 어렵게 다가온 한 번의 기회를 꼭 붙잡고 싶었습니다. 코로나시기 삼 년을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숨을 걸고 한국 가는 길을 선택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무사히 한국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중국을 떠나 다섯째 되는 그날 메콩강에서 태국으로 가는 배를 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제야 위험한 곳을 벗어나 안전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고 마음이 편안했던 것입니다. 한국으로 오는 길이 쉽지 않았는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저를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고 저는 태국에서
이민국으로 가서 24일이란 시간을 걸쳐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드디어 내가 한국에 도착할 것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설레며 기뻤습니다. 내가 드디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 행복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저는 다시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어서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정말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꿈이 아닌가? 자신을 꼬집어보기도 했습니다.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은인들이 있었기에 제가 떳떳한 한국 국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너무너무 고맙고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항상 감사하며 저를 도와주신 분들께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잘 살아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모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