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실상

[증언] [증언]운명의 두 날 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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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유영복

2000년 탈북, 2000년 한국 입국

편집: 윤영일 <지원팀 매니저>

삽화: 안충국 <탈북화가>

탈북 국군포로 유영복 님이 육필 수기를 시민연합에 기증해주셨다. 이 수기에는 북한에서의 힘들었던 삶과 여전히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의 송환이 속히 이뤄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유영복 님은 이 수기를 「뉴스레터」에 실어 많은 회원 분에게 국군포로의 삶을 알리고 싶다고 전하셨다. 이에 유영복 님의 『운명의 두 날』이라는 책으로 출판된 바 있는 수기를 요약해서 연재한다. (마지막회)

꿈에도 못 잊은 대한민국

중국 땅에 도착했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 공안은 북한을 탈출해 온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조선족이 사는 마을을 순회하면서 샅샅이 뒤지고 있어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수시로 거처를 옮기면서 한국에 있는 친척들과 연계를 취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우리가 중국에 도착하자 차츰 중개인들이 하나둘 나타나 우리에게 접근해 왔다. 이제부터 가야 할 한국행 노정은 더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마침내 한 중개인과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감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며 동생과 연락이 닿았다는 것이다. 다시 며칠 후, 동생과 전화 연결이 되었다. 그 순간의 감회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나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동생과 통화는 했지만, 헤쳐가야 할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 얼마 후 다행히 동생이 중국으로 들어왔고, 동생과 첫 상봉이 이루어졌다.

“형님”

“그래, 네가 영진이구나!”

형제라지만 처음 만난 사이라 서먹서먹했다. 그러나 형제의 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8월 말에 동생과 나는 연길에서 심양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드디어 8월 30일, 비행장 한쪽에 커다란 비행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타는 비행기였다. 저 비행기만 타면 대한민국으로 간다. 한걸음, 한걸음,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챌 듯한 불안감이 찰랑거렸다. 마침내 비행기 앞에 섰다. 얼마 후, 비행기는 바람을 가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동생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님, 이제는 안심하세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대한민국입니다.”

비행기에 올라타니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눈이 감겼다. 그러나 감겨 진 눈에는 70년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열 번째 국군포로로 조국에 돌아왔다. 북한에 남아 있는 친근했던 동료들,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료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 아버지 아들입니다

이제 얼마 후면 연로하신 아버지와 친척,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제 폐인이 다 되어 돌아온 나를 조국은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국군포로로 끌려간 것이지만, 어쨋거나 그동안 북한을 위해 열심히 일해오지 않았는가. 북한에 있을 때 종종 들은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남한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 ‘안기부’라는 곳이며, 그곳에 끌려가면 남산 지하실에 가서 모진 고문과 심문으로 거의 병신이 되어 나온다고 했다.

복잡한 생각에 잡겨 있다 보니 어느덧 한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문으로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북한과 똑같은 하늘일 것인데, 내 눈에는 전혀 다른 하늘로 보였다.

마침내 가족들 앞에 섰다. 가슴이 마구 뛰면서도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오늘, 그립던 사람들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영복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를 부르고 나자 비로소 목이 메었다. 아버지의 앙상한 손이 내 가슴을 찢어지게 했다. “아버지…” 나는 흐느끼며 아버지의 손을 꽉 쥐었다.

아버지는 나를 유심히 쳐다만 보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뜻밖이라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 듯 보였다. 연세가 많으셔서 정신이 깜박깜박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웠다. 20세 새파란 청년으로 나갔던 내가 백발이 되어 나타났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서 내 기억 속의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었었다.

내가 아직 정식으로 유영복이라는 확인을 받지 못한 신분이라 다음 절차를 받아야 했다.

나는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실려 지정된 곳으로 향했다.

차 창밖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줄지어 어이지는 화려하고도 장엄한 풍경, 번창한 시내와 끊임없이 스쳐가는 승용차의 모습이 경탄스러웠다.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번영하고 발전된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기적을 창조해 낸 세련된 도시의 모습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모든 절차를 마시고 나의 주민등록증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어엿한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1953년에 사망한 존재였으며, 이런 기쁨을 받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종종 “진짜 네가 죽었다던 영복이냐?” 하시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심정을 비치곤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나와 함께 했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나도 지난 시절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거워했지만, 가끔 의식 상태가 정상이 아닌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너무 늦게 돌아온 것이 서글프고 죄송스러웠다. 그나마 아버지가 버텨 주셨기에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이 고맙기만 했다. 아버지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고향의 어머니와 동생들 소식어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어머니를 그곳에 피난시키는 바람에 헤어지게 되었으므로 그 일을 평생 후회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새어머니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새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셨다고 한다. 새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아버지가 94세까지 장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국군포로의 귀환을 바라며

나는 한국에 와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고 체험했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적응하려면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오래 있었지만 북한에 대한 많은 것을 한국에 와서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이 많다. 쇄국된 북한 사회에서는 옳고 그른 것도 구분 못 할 때가 많다.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가 차된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도 없고, 간접적인 체험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짧은 기간에 이렇게 발전된 경제국가로 되기까지에는 국민들의 피나는 노력과 많은 땀을 흘렸다는 것도 배웠다. 그런데 북한은 1960년대가 자기들의 황금의 시대였다고 자랑할 뿐,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더 살기 힘들고 배고파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남한은 상대적 빈곤이 많기 때문에 부자들을 따라가기는 힘든 세상이지만, 극심한 장애자나 노약자가 아니라면 자기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 생존의 근심은 없을 듯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출신성분이 안되면 영영 사회의 하층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북한을 생각하면 우리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요, 행복의 낙원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 강제 억류되어 온갖 고초를 겪으며 감시 속에서 노역 당했던 수많은 군군포로들, 그들은 살아생전에 늙어서라도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오겠지 고대하고 모진 시련도 다 참아가면서 지냈건만 그날을 보지 못하고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얼마나 고국 땅을 그리워했으면 죽은 후에라도 내 유품을 반드시 조국 땅, 고향 땅에 묻어 달라 유언을 남겼을까!

언젠가 조국이 통일되는 날, 아니 그 이전에라도 반드시 북한과의 협상에서 국군포로들의 유해는 조국의 품으로 모셔 와야 한다. 그리고 한 생을 어둠 속에서 지낸 그들의 유족들도 정부가 따뜻이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국군장병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라고 본다.

그동안 험준한 노정을 거쳐서 한국으로 귀환한 동료 중 몇 분과 대화도 나누고,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보다 훨씬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탈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여 가혹한 형벌을 받고 오랜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감옥생활에서 풀려 난 후에도 굴하지 않고 또다시 탈출을 시도하여 끝내 귀환한 용감하고 장하신 분도 있었다.

전쟁의 포화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휴전 상태로 지속되고 있는데 북한에서도 아직도 야욕을 버리지 않고 온갖 도발과 책동을 벌이고 있으며, 핵무기까지 개발하여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은 전쟁을 그저 먼 과거의 일로만 생각하며 안보의식이 약해져 가고 있으니 안타깝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꽃다운 수많은 청춘이 죽어갔음을 제발 잊지 말기를 바란다. 또한 그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국군포로가 여전히 북한 땅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디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도 있다. 물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전쟁이 끝난 게 아니고, 다만 휴전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북한의 대남 도발 책동에 한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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