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자의 구호노트] RESCUE : 조용하고 안전하게

[김영자의 구호노트] RESCUE : 조용하고 안전하게

우리가 구호활동을 해야하는 이유

북한인권시민연합은 1996년 창립 이래 북한난민 구호 사업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북한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동남아시아 등 제3국을 경유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안전한 길로 이끌며, 중국에 숨어있는 북한난민에게 음식, 의약품, 옷가지 등을 제공하는 구호 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으로 강제송환 될 때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 여성, 어린이를 최우선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안전하게 구조해 202012월 말까지 1,156명을 구출했습니다작년 한 해 코로나-19로 인해 북한난민 구출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걱정입니다. 요즘 중국에서 이동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동남아 이동상황을 점검하던 중, 미얀마 사태로 인해 근처 국가들의 국경들이 많이 긴장하고 있어, 북한난민 이동은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 2월 초, 할머니 한 분과 어린 여자아이가 도움을 요청해와 은신처에서 지낼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요즘 북한에서 전해오는 소식을 들으면, 20년 전 고난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그때로 되돌아가면 모두가 힘들겠지만, 제일 힘든 것은 어린아이들과 여성입니다. 전쟁상태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때 우리의 도움으로 한국에 정착해 잘살고 있는 아이들-지금은 아기엄마, 아빠가 됐습니다.-을 보면서 하루빨리 통일되어 이 큰 고난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2005년 시민연합의 도움으로 한국에 정착한 청소년들이 겪은 이야기를 적습니다. 이 청소년 4명은 2004년 시민연합 이원웅 이사께서 중국을 방문했다 만난 10대 후반의 탈북청소년입니다. 이들은 모두 함경북도가 고향이고, 2002년 식량난으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마음씨 고운 조선족을 만나 그동안 보호받고 있었는데, 이제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었지요. 만약 이들이 방치된다면 중국 공안에게 잡혀서 북한으로 송환되거나, 거리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 2004년 “세 탈북소녀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자”라는 모금 캠페인을 벌였고, 이 사실을 동아일보에서 실어주었고, 이 기사를 본 호야 아카데미 강경호 대표께서 전화로 모금에 대해 문의한 다음, 1,200만 원이 입금되어 이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라오스 국경에서 이들을 만나 방콕의 한국대사관까지 이동했습니다. 대사관에 보낸 후 소주 한 잔 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고생을 해야 하며,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지?….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언제 이 활동이 멈출까요?

아래 증언은 시민연합 앞으로 저도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한, 원이 이야기입니다. 원이는 중·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저는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에서 태어났습니다. 북한에서 식량난이 일면서 경제가 어려워지자 살기가 곤란해졌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그다지 생각나는 것은 없고, 학교 안 가면 선생님이 때렸는데 자주 가지 않고 그냥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가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98년도에 탈북하여 자리 잡은 곳이 중국 길림성 왕청입니다. 주소를 자세히 아는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99년도 7월쯤에 이모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너무 많이 불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돈 200원에 사람을 사서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이모가 누군가에게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그네가 나타나서 저는 그 사람을 따라가고 이모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 돌아갔습니다. 그 나그네를 따라가니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조선족인데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가 공안에 높은 사람을 알고 있어서 저는 조선족이 다니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족 학교에서 5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2003년 11월 14일 공부하는 중 공안이 와서 경찰서에 엄마가 있으니 가자고 해 따라갔더니 엄마가 경찰서에 잡혀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점심 먹이고, 왕청 감옥소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에서 3, 4일 있다 도문수용소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조사를 받을 때 누구와 같이 탈북했는지, 언제 왔는지, 도와준 사람 누구인지, 어디서 살았는지에 관해 물어봤습니다. 그래 살던 곳은 왕청이고, 탈북할 때에는 먼저 이모가 같이 넘어오다 물이 깊어 다른 남자가 도와주어 넘어왔는데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는 더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의 식사는 한 끼에 선밥을 반 주먹 정도와 소금국을 주었는데, 소금국이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이미 허약에 걸렸습니다. 그곳에서 2, 3일 후에 북조선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이곳에서는 엄마와 따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남자는 팬티만 입게 하고 나머지 옷을 모두 벗게 합니다. 벗긴 옷은 옷 솔기 솔기를 샅샅이 뒤져봅니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팬티 속을 뒤집니다. 혹시 숨겨서 온 돈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는 감방으로 들어가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책상다리하고 두 손을 앞에 놓은 채로 앉아 있게 합니다. 한 사람씩 불러내어 조사하는데, 잡혀 온 지 이틀 후 엄마와 저는 간수가 불러서 무엇을 물어보았는데 이미 허약에 걸려 정신이 없어 무슨 소리인지 몰라 대답을 못 하자 간수가 손으로 얼굴 정면을 3번 때리자마자 저는 엎어져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때린 사람이 이거 죽었는가 하면서 앞으로 엎디라고 하여 엎뎌있었더니 조금 정신이 들면서 괜찮아졌습니다. 엄마는 저보다 많이 맞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저는 조사를 하지 않았고, 며칠 후부터 엄마만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간수가 안 보고 있을 때 책상다리를 피거나, 눕는 경우 간수에게 들키면 앞쪽으로 불러내어 손을 창살 밖으로 내밀게 한 후 몽둥이나 손전등으로 때려 손톱이 새까맣게 멍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14일 동안 책상다리 앉은 자세로 있었고, 식사는 국수 죽을 밑바닥이 보이는 정도의 양을 줍니다. 후루룩 마시면 그만입니다.

변소 갈 때는 서서 “선생님 3호 3번 소변볼 수 있습니까.” 간수가 “응”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소변을 볼 수 있지만, 간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소변을 못 봅니다. 우리가 갇혀있던 작은 방에 열 명 이상이 앉아 있어 상당히 좁습니다. 소변을 보는 변소는 그 감옥 안에 있고, 누워 잘 때는 발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똑바로 눕지 못하고 모로 누워 잡니다. 바닥은 나무 바닥인데 덮을 담요도, 깔 요도 없이 입은 채로 그냥 웅크리고 자야 합니다. 저도 그곳에서 발이 얼어 나중에 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변은 방에서 보지만, 대변은 밖으로 나가 여자들이 있는 방에서 봅니다. 그때도 “선생님 대변 다 봤습니다.” 하면 간수가 “응” 또는 “알았다”라고 합니다. 그곳에선 목욕도 못 해 이가 너무 많아 앉아서 이를 잡기도 했고, 저는 치약, 비누, 휴지를 가지고 가서 나올 때까지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잡혀 온 사람끼리 때리기도 합니다.

11월 29일 저의 번호를 불러 나갔더니 엄마와 함께 고모네 동네인 동포구에서 온 차를 타고 동포 안전부에 도착했습니다. 안전부에서도 조사했는데 보위부와는 다르게 동복만 벗기고 손으로 옴 몸을 만지며 조사했습니다. 저는 나이가 어려 안전부에서 하루만 자고 고모네 집으로 보내졌고, 엄마는 안전부에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고모네 집에 도착 후 엄마가 안전부에 있다고 알리자 고모가 안전부에 가서 엄마를 만난 다음 엄마는 고모네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3, 4일 후 안전부에서 엄마와 나를 다시 불러 엄마는 6개월 동안 노동단련대로 보내졌고, 저는 나이가 어려 고모네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노동단련대에서 허약에 걸려 3달 만에 병보로 나왔습니다. 엄마와 저는 고모네 집에서 몸을 추스른 후 엄마가 2004년 5월에 먼저 탈북해 돈을 벌어 가지고 와 저를 데리고 탈북했습니다. 탈북해 먼저 탈북한 이모 집에서 생활하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다시 이동했고, 또다시 왕청으로 이동해 다시 잡혀갈 것이 두려워 지금까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방에서만 지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탈북민과의 설맞이

지난 2월 우리 설날에 탈북민 가족과 2001년 시민연합에서 한겨레계절학교 봉사활동을 했던 이진영 자원봉사자 가족, 탈북청년 오세혁 씨 등이 제집에서 떡국, 빈대떡 등을 먹으며 설맞이를 했습니다. 탈북민 가족과 자원봉사자 가족은 10대의 아들, 딸이 함께해 서로의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하나원을 나온 탈북민 가족은 코로나로 인해 남쪽 주민들과 어울릴 수 없었고, 청소년인 아들과 딸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니 또래의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고, 공부도 막막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이렇게 만나서 책을 읽고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말뜻도 익히고, 글 안에 담고 있는 뜻을 이해할 수 있어 우리 사회 정착이 쉽겠지요. 탈북민들에게 남쪽 사회에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다 보면 저절로 고쳐지고, 속뜻을 알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힘듦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탈북민 자녀인 두 학생은 시민연합 학습 멘토링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누어 쓰기 운동

시민연합을 인턴으로 활동했던 유혜림 씨와 이름 모를 후원자께서 탈북민과 나누고 싶다며 옷가지와 신발 등을 보내왔습니다. 감사합니다.